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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15. 2020

신은 없지만 악마는 있어요

어느 독일인의 삶

2016년에 독일에서 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는 걸 뉴스로 본 적이 있다. 독일 사회에 상당한 경종을 울렸다는 소식과 함께 말이다. 2017년 국내에서도 이 다큐멘터리가 알음알음으로 상영을 하긴 했지만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2018년, 다행히도 그 얘기가 책으로 나왔다니 이 책 <어느 독일인의 삶>을 주저 없이 사서 읽었다. 다행이었다, 이 책을 보게 돼서. 그리고 네가 2020년 봄 코로나 19로 학교를 못 가고 있어 심심했는지 서재에서 책을 고르길래, 이 책을 읽어보라고 줬는데, 네가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브론힐데 폼젤.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전직 비서. 그녀의 단 하나의 주장. "나는 책임이 없다."

책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녀는 정말 책임이 없는가. 그리고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내가 폼젤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 어려운 문제다. 동시에 지금이 과거의 그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바라, 이 작은 책이 우리 시대에 가지는 무게가 엄중하다.  


독일의 나치 이야기는 너도 학교에서 배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도 일단, 그녀의 얘기를 들어 보렴. 아빠가 최대한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1. 우린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우리는 집에서 자연스럽게 순종을 배웠어요. 가정 안에서 사랑과 배려 같은 건 부족했죠. 오히려 우리는 순종하는 가운데 조금씩 서로를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에 익숙해졌어요.


1933년 전에는 누구도 유대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순전히 나중에 나치에 의해 만들어진 거죠. 우리는 국가 사회주의를 통해서야 유대인들이 우리와 다른 인간이라고 의식하게 됐어요. ... 1933년 이전에 유대인 문제를 생각한 사람들은 소수였어요. 처음에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었고 돈이 생겼어요. 나중에 우리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사기를 당했다고 배웠어요. 한마디로 우리는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우리한테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몰랐어요.


2. 한마디로 히틀러는 새로운 사람이었으니까요


히틀러 취임 직후엔 한마디로 그냥 희망이 들끓었어요. 히틀러가 정말 정권을 잡으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했어요. 정말 깜짝 놀랄 일이었죠. 아마 그 사람들 자신도 깜짝 놀랐을 거예요.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뒤가 그랬어요. 베를린의 거리 곳곳에 실업자와 거지,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 났어요. 하지만 나처럼 베를린 근교의 좋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궁핍과 가난이 판치던 시절에도 그런 특별한 지역이 있었던 거죠. 우린 그런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보지도 않았어요. 그냥 외면해 버렸죠.


그리고 얼마 있다가 블라이 씨가 말했어요. 「당에는 가입했죠?」 「아뇨. 가입하지 않았는데요」 그러자 그 양반이 다시 말했어요. 「음. 그런 일을 하려면 가입하는 게 좋아요」 ... 하지만 그보다 더 아팠던 것은 입회비로 10마르크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 그럼에도 나는 가입 서류에 서명을 했어요. 방송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10마르크 정도는 금방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실제로도 그랬어요. 


강제수용소가 만들어졌을 때, 그러니까 처음으로 <강제수용소>라는 말이 나왔을 때도 그랬어요. 정부에 반대하거나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만 그리로 간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린 그런 인간들을 바로 감옥에 가두지 않고 강제 수용소에 보내 재교육하는 걸로 믿었어요. ... 그런 사람이 갑자기 강제 수용소에 갔다는 거예요.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어요. 「응? 그 사람이?」 「호모래」 「맙소사, 호모라니.」 ... 어느 날 갑자기 내 유대인 친구 로자 레만 오펜하이머가 사라졌어요. 부모가 하던 비누 가게도 문을 닫았고요. 가족이 모두 없어졌어요. 


3. 약간 선택받은 느낌이었어요


약간 선택받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하는 것이 만족스러웠어요. 모든 것이 편했고 마음에 들었죠. 쫙 빼입은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 그래요, 난 그 시절 껍데기로만 살았어요. 어리석게도요.


나는 괴벨스의 진면목을 나중에야 알게 됐어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베를린 체육관에서 열린 행사 말이에요. <총력전을 원하는가?>라는 구호로 유명한 행사였죠. ... 연설을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었어요. 대중을 휘어잡는 기술이 뛰어났죠. 실제로 그날도 괴벨스는 서서히 자기 말에 도취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화산 폭발과 같은 순간이 찾아왔어요. 무슨 정신 병원에서 일어난 광란의 폭발 같았어요. 「이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괴벨스가 이렇게 외치는 순간이었어요. 그러자 마치 다들 말벌에 쏘인 것처럼 갑자기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지르고 발을 구르고 두 팔을 미친 듯이 휘둘러 댔어요. 귀청이 찢어지는 줄 알았어요. 


괴벨스의 개인 참모 프로바인 씨가 그와 관련된 재판 서류 일체를 나한테 선뜻 넘기면서 금고 안에 보관하라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죠.  「서류 내용은 보지 말아요.」 나는 당연히 그렇게 했어요. 내 상관이 시킨 거니까요. ... 나에 대한 그 사람의 신뢰가 고맙고 뿌듯했죠. 약속을 지키고 나니 난 나 자신이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졌어요. 


4. 몰락의 순간까지도 충성을


그러던 중에 슈배거만이 건너와서 말했어요.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우리는 사지가 마비된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어요. 


나는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당시엔 그런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저 난 항상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줬어요. 그만큼 성실하게 잘했고, 항상 정확했어요. 어떤 자리에 있건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완수했어요. 평생 그랬죠. 당시도 물론이었구요. 그 일이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상관없었어요. 방송국에서 근무하건 선전부에서 일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어디에 있건 마찬가지였어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5. 우린 아무것도 몰랐어요 


악은 있어요. 악마도 있어요. 신은 없지만 악마는 있어요. 정의는 없어요. 정의 같은 건 없어요. 


지금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어요. 나치에 대항할 수는 없었느냐고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어요.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까요. ... 나치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소수 있었지만, 그게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도움이 됐나요? 그 사람들만 목숨을 잃지 않았나요? 오히려 국가에 다른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어요. 그래서 추천을 받아 하루라도 더 일찍 당에 가입하려고 했어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독일은 선장 없는 배나 마찬가지였어요. 나라를 이끌 인물이 없었죠. 그 때문에 히틀러는 손쉽게 권력을 잡았어요. 그때 그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무수한 실업자들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러시아인들이 나만 꼭 집어서 잡아간 것이 전적으로 부당하고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나는 괴벨스 맡에서 타자를 친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죠.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뭐라도 한 게 있다면 책임을 져야겠죠.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 물론 어리석었다는 면에서는 책임이 있어요. 하지만 원래 어리석게 행동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도약을 약속했고, 처음 몇 년 동안은 실제로 그리될 것도 같았어요. 전쟁에 패배한 뒤 도저히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배상 협정에 묶여 있던 낙담한 국민들에게 민족의 부흥을 약속하는데 누가 마음이 동하지 않겠어요?


6. 난 책임이 없어요 


그래요, 난 책임이 없어요. 어떤 책임도 없어요. 대체 뭣에 책임을 져야 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 져야 할 책임도 없죠. 혹시 나치가 결국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요, 그건 우리 모두가 그랬어요.


오늘날 우리는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끔찍한 일들을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어요. 또 수백 명의 난민들이 바다를 건너다 죽는 것도 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끝이에요. 방송이 끝나면 금세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즐겁게 저녁을 보내죠. 그런 걸 본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지도 않아요. 그런 게 인생이겠죠. 모든 게 그렇게 섞여 있는 게 난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어때? 그녀의 얘기가 무척 설득력 있니? 사실 아빠에게는 일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화가 치밀기도 하지. 일단, 그녀가 몰랐다, 책임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그녀의 재판과 관련이 있음을 그녀도 시인했다. 진술의 일관성은 재판에서 아주 중요하거든. 그래서 복잡한 상황 설명이나 주장은 나중에 기억이 편집되거나 순서가 바뀌는 오류로 곤란에 처하기 쉽다. 그래서 '몰랐다', '책임이 없다'가 가장 쉬우면서도 일관되게 주장하면 스텝이 꼬이지 않는 방법이다. (한국에서는 죄짓고 잡혀 온 정치인들이나 기업 총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수십 년 동안 살면서 심리적으로 충분히 내재화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치 MB와 KH가 나라를 망쳐 놓고 물러 났을 때 권력의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 어떻게든 그들에게 잘 보여 한자리 얻고 싶었던 사람들, 그들을 지지했던 언론과 일반인들의 입을 통해 많이 듣던 얘기기도 했다. 그냥 출세를 위해,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했다는... 그랬다는... 


그녀의 개인적 순진함과 무지를 들면서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종전에 이미 독일인의 40% 이상이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괴벨스의 유대인 말살 계획을 최상층부 속기사가 문서의 내용을 전혀 몰랐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한 사회가 전체적으로 그런 삶을 살게 만드는 동인은 책에서는 결국 정치· 사회에 대한 무관심, 외면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나쁜 정치인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지켜야 하는 민주주의, 사회·인간적 연대, 보편적 인권, 이런 것에 대한 외면이 결국은 우익 포퓰리스트들에게 틈을 만들어 주고 정치와 언론에 활개를 치게 만드는 것이다.  


폼젤은 사실 우리 안에 있는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된다. 아빠라고 해서 폼젤이 되지 않았을지는 자신이 없다. 우리 안에 있는 개인적인 이기심, 출세욕, 상류층에 끼고 싶은 욕망, 이런 것들이 여전히 삶에 주된 동기로 남아 있다. 그래서 히틀러 같은 사람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사회적 환경, 이데올로기와 선전, 체제에 대한 위협, 대량 실업, 이런 요인들이 합쳐지면서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활개를 치는 상황을 막아야만, 그래야만 우리 안의 폼젤이 무지와 외면을 통해서 악의 하수인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때와 같은 일이 지금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니? 아빠도 채권딜러였을 때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표를 받을 때마다 채권 금리가 얼마나 빠질지만 고민할 뿐, 이런 일들이 결합되어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심각하게 생하지 않았다. 아빠가 사는 이 시대에 러시아 푸틴의 독재정치, 터키 에르도안, 필리핀의 두테르테, 미국 트럼프의 독선, 중국 시진핑의 장기집권 기반 확보, 이런 스트롱맨들의 권력 강화가 무섭게 진행되었다. 터키의 에르도안이 시리아 난민을 핑계로 극우로 치닫고(이 사람이 한때 인권상도 탔었던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의 포퓰리스트 오성운동과 극우 리그당, 독일에서 극우 독일대안당의 선전, 오스트리아에서의 극우세력의 놀라운 부상, 프랑스 우익 르펜과 네덜란드의 극우 세력 헤이르트 빌더로스의 성공, 그리고 브렉시트. 다시 1930년대처럼 유럽의 파시스트를 부활하고 유로가 깨지는 것이 소설만은 아니지 않을까 걱정했다.   


과거의 히틀러처럼 오늘의 트럼프는 아메리칸드림의 몰락, 즉, 백인 중산층 몰락의 주범이 금융의 지나친 확장과 탐욕, 세계화를 통한 노동시장의 붕괴 등에 있음에도 그 비난의 화살을 다른 곳에 돌린다. 상황도 닮았다. 독일은 1차 대전의 무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1929년 대공황에 의한 대규모 실업을 안고 있었으며 미국 또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량 실업으로 아픔을 겪는 와중에, 히틀러가 비난의 대상을 유태인으로 삼았듯이 트럼프는 라틴아메리칸과 무슬림, 그리고 북한 등 되는대로 다 끌어다 썼다. 조사에 따르면 미국 실업의 70%가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산업 변화에 있고, 나머지 30%의 책임은 세계화에 있다고 한다. 그것도 미국이 주도한 것임에도 수출국들로 총구를 돌려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역사에 흔히 있는 수법이다. 기득권층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들을 따돌리고 SNS로 거짓 뉴스를 흘리면서 말이다. 외국인들에 대한 관용과 여성 및 동성애자들의 권리, 그리고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는 더 이상 자기의 가치 중심이 아님을 선언했음에도 백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것은 미국의 우경화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당장의 경제적 불만이 그 자양분임에는 분명하다.  


폼젤의 얘기를 다시 들어 보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독일은 선장 없는 배나 마찬가지였어요. 나라를 이끌 인물이 없었죠. 그 때문에 히틀러는 손쉽게 권력을 잡았어요. 그때 그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무수한 실업자들이었어요.


이 이야기가 무섭지 않니? 지금 정부들도 폼젤의 이 이야기를 간과하면 안 된다. 현재 일반 노동자들은 세계화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잠재적 대규모 실업이 예정되었다는 공포감이 상당히 크다. 그리고 마치 난민이나 이민자들에 의해 유럽의 실업이 확대된 것처럼 극우 정치인들은 언론과 SNS를 이용해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우경화 흐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촛불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했지만, 그러나 우리나라도 당장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신규 취업자 수 증가가 부진하고 자영업이 어려워지면서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니 극우 세력들이 슬금슬금 대가리 드는 것을 보고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경제를 잘 이끌어야 하는 것도 분명한 역사적 책무다. 계속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경제정책들을 수정할 건 하고 설명을 잘해야 한다. 제대로 좀 해야 하는데 답답하기만 하다.  


오늘날 우리는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끔찍한 일들을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어요. 또 수백 명의 난민들이 바다를 건너다 죽는 것도 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끝이에요. 방송이 끝나면 금세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즐겁게 저녁을 보내죠. 그런 걸 본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지도 않아요. 그런 게 인생이겠죠. 모든 게 그렇게 섞여 있는 게 난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부끄럽게도 사람들은 인류애를 얘기하기에는 당장 우리의 삶이 너무 팍팍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또 다른 폼젤이 되지 않으려면, 특정 집단을 비난의 희생양으로 삼고 가난한 자들의 분노를 거짓 정보로 공포심을 자극하며 이용하는 극우 세력이 처음부터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주의가 권력을 잡았을 때 개인에게 저항하라고, 그리고 그 개인에게 목숨을 걸라고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독일인의 삶이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한다. 우리가 정치에 늘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이슈에 민주적 연대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도 모빌리티 분야의 새로운 변화와 택시회사 간의 문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자영업 구조조정, 그리고 정치와 법조인들의 강력한 기득권의 조정, 대입에 올인한 교육문제, 부동산 정책에 따른 갈등, 시급한 청년실업 등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이것들을 해결하든 못하든 보수 언론들이 인간의 기본적인 개인주의 성향을 이용한 극우화의 논리를 펼치면서 우경화의 길로 계속 유혹하고 있다.   


역사가 그 많은 피로 얻어낸 민주주의와 인간애, 인류 간의 연대와 여성 및 소수 인종, 성소수자들에 대한 존중. 이런 것들이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것을 우리 시대에, 그리고 네 시대에, 그리고 이 땅에 살아갈 자손들의 시대에 보고 싶지는 않다. 미국과 유럽은 국민들이 난민이 밀려오는 것에 대한 불안감으로 우경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애초에 난민들이 생기지 않도록 시리아, 중동, 팔레스타인, 아프리카와 남미 여러 나라들의 상황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며 세계가 힘을 모아 돌봐야 한다. 2018년 말 뉴스에서 멕시코의 90년에 가까운 부패 우파정권을 몰아낸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난민 카라반 행렬을 막으려고 남미에 대규모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200억 불 투자계획을 세워 트럼프도 동참해 주기를 요청했었다. 트럼프는 반대로 난민을 막기 위한 국경 장벽 예산을 반영 안 했다고 하원의장을 위협하고 서류를 집어던진 것과 비교되었다. 두 나라의 차이는 권력 기반의 차이와도 같다.  


많은 역사가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면, 독재를 바탕으로 한 국가주의가 권력을 잡거나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되고, 이를 통해 주변의 나라들을 침략 또는 착취하는 일이 많았다고 얘기한다. 지금 인류가 그 사실을 잘 아니까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자신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글로벌 경제위기가 온다면 우경화된 국가 간의 충돌이 그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건 아빠만의 기우이기를 바란다. 과거 독일 나치 시대를 살았던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재 우리사회뿐만 아니라 글로벌 전체가 어려운 경제환경 속에서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극우 세력을 다시 키워왔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또 아빠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폼젤이 되어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악은 있어요. 악마도 있어요. 신은 없지만 악마는 있어요. 정의는 없어요. 정의 같은 건 없어요.


우리 딸이 이런 말을 하며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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