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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20. 2020

넌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서 살거니?

배고픔과 배아픔

할머니와 네가 지금 2020년이라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기억과 생각은 크게 다를 거야. 어쩌면 서로 다른 나라를 이야기하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전 세계가 최근 100년간 빠른 속도로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중에서 대한민국은 그 속도와 폭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나라니까. 그래서 연령대별 독특한 코흐트 분석이 가능한 나라다. 1940년에 태어난 할머니에게 대한민국은 일본의 패망 후 강제로 분단되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그 대한민국은 박정희라는 대통령을 만나서 산업화의 기틀을 닦고, 전두환이라는 대통령을 만나서 눈부신 발전을 이룬 나라라고 말한다. 가족확장적 국가 개념이 강해서 모든 공은 항상 독재자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교육받으셨다. 그 이후의 대한민국은 당신의 이해 범위를 벗어났다. 그러나 너에게 대한민국은 물질적으로 부족한 적이 없는 풍족한 나라다.(다만, 부모를 잘못(?) 만나서 절약을 강요당하긴 했다.) 비록 학원을 전전할지라도 최신 스마트폰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라다. 미국 'US뉴스월드 앤 리포트'에서 2020년 강대국 순위를 지도자, 경제적 영향력, 정치적 영향력, 강력한 국제 동맹과 강력한 군사력을 기준으로 평가했는데, 한국이 무려 9위에 올랐다. 물론,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서 실제 능력치와는 다소 다를 수는 있겠지만 굉장한 수치임에는 틀림없다. 할머니 때는 200등 밑에 있다가 너는 이제 9위의 나라에 사는 것이다. 이 순위가 국민의 행복도에 대한 순위가 아니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두 나라는 같은 나라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프레임 중 나름 의미 있는 관점은 '수축사회'관점이다. 이 단어는 대우증권의 마지막 대표를 역임했던 홍성국 씨가 <수축사회>라는 책을 통해 만든 용어다. 간략히 말하면, 지금까지 인류는 진보와 발전을 통해 계속 팽창해왔다. 파이가 점점 커지는 과정에서 일부 부조리도 눈 감고 실패가 있어도 회복할 기회가 있었다. 20세기 후반 IT 기술을 기반으로 교통, 통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진정한 지구촌을 만들었다. 그리고 저금리, 유로화 출범, 세계화, BRICs 개발이라는 4가지 효과로 마지막 불꽃놀이를 즐긴 다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다. 이것이 수축사회로의 전환되는 트리가 되었다. 고령화 현상이 본격화되고 인구는 줄어드는데 부채는 늘어만 간다. 4차 산업혁명은 일자리를 날려 버릴 뿐만 아니라 기존 질서를 흔들며 전 세계를 수축사회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장에 기반을 둔 모든 이론과 신화들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홍성국 씨는 수축사회의 주요 특징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1. 원칙이 없는 이기주의 : 파이가 작아지면 자기밖에 안 보인다. 밀리면 끝이다. 

2. 입체적 전선에서 모두가 전투 중 : 한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수축되니 전선도 무지 넓다. 더 심각한 것은 모든 사안들이 상호 연관성이 높아지면서 복잡 반응계를 이루고 있어 예측이 어렵다 

3.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 눈앞만 바라본다 : 개인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4. 팽창사회를 찾아서 집중화 : 그나마 팽창이 가능한 곳이 있다면 몰려간다. 특정 기업으로, 서울로.  

5. 심리게임 - 정신병동 : 이러니 모두 비쳐버린다.  


나름 설득력이 있다. 또한 수축사회 프레임은 다양한 현상을 해석 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서울에 집중되는 부와 권력, 상위권 대학에만 학생이 몰리는 현상, 용서가 없는 경쟁 등 많은 현상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다. 


서가명강(서울대를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 이 명칭도 사실 대학의 서열화를 이용한 마케팅 수법이다. 이런 것들이 다시 대학의 서열화를 부추긴다.)에서 인기를 끈 이재열 교수는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라는 책에서 현재 대한민국을 불신, 불만, 불안의 3불 사회라고 정의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 사회의 변화 속도 속에 경제적, 정치적 성과가 있었지만 도덕과 규범의 괴리와 타인과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불신의 대상도 광범위하다. 유리지갑 근로자들의 조세제도에 대한 불신, 교육제도와 입시제도에 대해 불신, 상당히 타당한 언론에 대한 불신, 검찰과 법원, 경찰 등 권력기관에 대한 불신이 넘쳐난다. 불신에 대한 반응은 사실 공정과 공평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1997년 외환위기는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는 불안을 안겨줬다. 그래서 에코 세대는 더 높은 교육을 받았고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취직하려는 안전추구 성향을 갖게 되었다.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불가능하게 해서 경쟁자들을 탈락시켰다. 복지 시스템은 미비한 가운데 노후를 맞게 되는 베이비부머도 크게 다르지 않다. 50대 이후 재취업은 불가능하고, 애완견은 가족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족이 아닌 시대. 그게 이들이 마주한 현실이다.  


남들이 누리는 것을 본인이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크게 늘었다. 끊임없이 소비를 강요하는 대중매체뿐만 아니라 편집효과에 숨겨진 화려한 이웃들의 SNS는 본인의 찌질한 인생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에코 세대는 부모를 잘 만나야 '실패해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 일하고 싶지만 눈높이에 맞는 일지리는 없다. 과도한 대학 진학률과 직업 간 임금격차는 이런 불균형을 더 가속화시켰다. 2013년 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이라고 불리려면 얼마나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평균 월급 567만 원, 연봉 7000만 원이라고 답했다. 통계청 조사 결과 이 정도 소득은 상위 6.5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상위 1% 수준이다. 중산층의 기준이 이렇게 높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당연히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없다. 이런 기준으로 인해 강남에서 3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모델로 자신과 비교해온 국민이 모두 자학적인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아빠 후배 중 성훈이가 과거에는 배고픔의 문제였지만, 이제는 배아픔의 문제라고 늘 말했었다. 이재열 교수는 물질재는 해결했으나, 지위재는 물질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세련되게 표현했네. 성장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물질재보다 지위재가 더 중요해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교육과 직업(여기에 더하자면 강남이라는 사는 곳까지)이란다. 이 땅의 청년들이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이유를 레드 퀸(Red Queen) 효과 (※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빨간 모자 여왕이 앨리스가 달리면 똑같은 속도로 달려, 앨리스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늘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효과 )라고 설명한다. 사회적으로, 늘어나는 생산성은 아무것도 없는, 지위재를 둘러싼 경쟁을 중지하면 좋겠지만 아무도 먼저 멈출 생각을 안 한다.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대한민국이 아주 큰일 난 것처럼 보이지? 금방이라도 사회가 수많은 갈등 속에 파묻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 않아? 사실 최근 사회적 갈등비용이 크게 증가한 것 같긴 하다. 신호등 건널목을 하나 만들어도 달라지는 사람들의 동선에 따라 피해보는 곳이 생기기 마련인데, 가만히 안 있는다. 시청 앞에서 확성기 틀고 시위할 거야. 수축사회 속에 모두가 살기 어려워서 그래. 우리는 글로벌 차원에서 볼 때 소득수준과 행복수준이 비례하지 않는, 아니 극명하게 차이나는 나라다. 홍성국 씨는 해결책으로 '사회적 자본' 개념을 가져왔고, 이재열 교수는 '사회적 품격'이라는 주제를 가져왔다. 둘 다 비슷한 얘기다. 모두 갈등사회, 분노사회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지만 해결책은 사실 뜬구름 같은 이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은 언제나 위기였다. 그러나 또한 위기를 잘 극복한 나라이기도하다. 우리는 늘 갈등 속에 있지만, 갈등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사회 시스템을 조금씩 바꿔왔다. 나름 갈등의 순기능을 활용해 온 것도 사실이다. 아직 갈등 해소 시스템이 취약하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좋은 사회를 꿈꾼다.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이 있고, 제도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현실에 만족하며,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해 창업과 혁신 노력을 기울이고, 참여를 통해 민주적 변화를 끌어내려는 공동체 의식이 높은 사회, 이런 사회를 꿈꾼다. 이게 모두 사회적 자본이고 사회적 품격이다. 이상적이지만, 모두가 꿈꾸면 언젠가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지금 좀 헤매고 있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자. 우린 최소한 우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안다. 아니, 너무 잘 안다. 다들 목소리가 하도 커서 나쁜 것이 있으면 모두가 금방 아는 나라다.   


몇 해 전 신문에서(출처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사람들에 대해 외국인이 볼 때 의아한 것 세 가지를 얘기했었다. 첫 번째는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 사람들이 위협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빠 생각에는 외국 언론들이 자기 나라의 필요에 의해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는 측면도 있고, 북한도 진짜 무력도발을 시도하면 지도상에서 북한이 사라진다는 것을 안다. 두 번째는 일본과 무엇이든 경쟁심을 갖고 덤빈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볼 때 일본은 대단하고 두려운 나라인데, 그러나 대한민국은 무엇이든 기를 쓰고 일본과 경쟁한다는 것이다. 글쎄, 아마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안다면 그렇게 말 안 했겠지? 2002년 월드컵에서 얻은 자신감도 무시 못한다. 마지막은 한국이 얼마나 잘 살고 좋은 나라인지 한국인들만 모른다는 것이다. 고모네 로빈 오빠도 항상 서울에 오면 네덜란드 보다 한국이 훨씬 잘 살고 좋은 나라 같다고 얘기하지? 대한민국의 치안은 세계 최고다. 의료보험제도도 아주 우수하며, 대중교통 서비스도 저렴하며 체계적이다. 심지어 지하철은 표시된 정차위치에 거의 정확히 선다.(아빠가 미국, 일본, 영국에서 살아 봤는데, 한국이 최고다.) 거의 대부분의 사회 시스템이 선진국 최상위 수준이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불만이 많고 시끄러운지 항상 세계 최고 수준의 서비스에 눈높이가 맞춰줘 있다.  

 

최근 공정에 대해서 말이 많지만, 그것도 그렇다. 김난도 外 '서울대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발간한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 한국인들이 체감하는 공정성이 낮아진 이유는 오히려 불평등·불공정이 축소되면서 평등과 공정에 대한 요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냈다.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은 "만약 사회가 완전하게 공정하다면 빈자, 실패자, 야당, 그 외 많은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사회 탓으로 돌릴 명분이 없어진다. 불공정해야 말이 된다. 만약 공정한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용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고 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의 열등성을 부정할 수 있다. 그래서 불공정하다고 외친다"는 논리를 폈다.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있다. 오히려 공정성 시비를 피한답시고 문제를 모두 객관식으로 내는 바람에 창의적인 사고를 막고 있는 것이 우려되기는 한다.  


만약 누가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아빠의 대답은 "그렇습니다."이다.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신이 무작위로 태어날 신생아들이 살아갈 국가를 세계 인구비중에 따라 배정한다면, 확률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보다 경제적으로 또는 정치, 사회적으로 뒤처진 나라에 살 확률이 아주 높다. 일단, 중국에서 태어날 확률이 18.5%, 인도에서 태어날 확률은 17.7%다. 이어서 미국에서 태어날 확률은 4.2%고, 뒤를 이어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브라질, 나이지리아, 방글라데시아, 러시아, 멕시코가 10위권에 든다. 한국에서 태어날 확률은 0.7%다. 10위권의 국가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태어난다면 그건 아주 큰 행운임에 틀림없다. 물론, 상대적으로 대한민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도 많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대한민국, 그렇게 나쁘지 않아. 우리에게 BTS도 있잖아. 사실 원래 질문이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서 한국에 살기 싫은 사람은 지금 위에서 말한 이유로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는 뜻이지 실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나라에 산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의 말과 글, 역사를 지켜낸 조상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어르신들, 그리고 민주화를 이루어 낸 386세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아까워서라도 여기 살고 싶다.(다른 나라에 태어 난다면 이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할 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에 분노하고 불만을 갖는 것은 대한민국이 나쁜 나라여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 있고, 더 좋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내 남은 삶을 위해서, 우리 딸이 좀 더 행복한 나라에서 살도록 하고 싶어서기도 하고,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서사적 관점에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좀 더 좋아진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아빠가 오히려 궁금한 건, 넌 다시 태어나도, 아빠 딸로 살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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