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by 김주원

설 연휴 셋째 날인 오늘, 다친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상황에서 장모님의 친정이자 아내의 외가에 장모님을 모셔다 드려야 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원래는 아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모셔다 드리겠거니 하고 별생각 없이 누워 있었는데 아내는 안방에 누워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더군요. 오전 9시가 넘은 시각, 저는 제 방에서 나와(저의 극심한 코골이 때문에 신혼 때부터 각방을 쓰고 있습니다) 안방에 들어가서 잠깐 부스럭 대니 아내가 귀찮아하는 (처참한) 몰골로 엄마 어떻게 좀 해보라더군요.


장모님한테 가서 무슨 일인고 여쭤보니 지금 친정에 가야 하는데 아내가 자고 있어서 데려다줄 사람이 없는 게 많이 서운하셨나 봅니다. 아내는 평소에도 아침잠이 많기에 장모님께 붕대감은 제 손을 들어 보이며 이 꼬라지라도 운전은 가능하니까 천천히 가자고 제가 데려다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장모님은 금세 화색이 돌면서 다른 방에 누워계신 장인어른께 같이 가자고 했지만 장인어른은 우리 아이들을 봐줘야 된다면서 집에 계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아이들은 제가 보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처가와 시가는 나이가 들어도 어려운 곳인가 보다 생각하니깐 잘 삼켜졌습니다.


아무튼 전날 우리 집에서 놀고 아침까지 거실에서 곤히 자고 있는 처조카도 부산 처가에 데려다줘야 했기에 장모님과 처조카를 차에 태우고 길을 나섰습니다. 다행히 가는 길에 차는 막히지 않아 부산에 먼저 도착해 처조카를 내려주고 울주군 서생면으로 향했습니다.


자주 본다고는 해도 장모님 역시 친정가족이 그리웠을 테니 볼 일만 보고 금방 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몇 시간 있다가 바로 출발할 줄 알았는데 장모님은 이모님, 이모부님과 함께 슬슬 술잔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왠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출발하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늘 세웠던 계획을 하나씩 지워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한 심정은 '아, 오늘 소중한 내 시간, 내 하루가 다 날아가겠구나'였습니다.


커피 한잔 마시며 보고 싶었던 책 1권 완독 하기와 아이들과 공놀이하기, 블로그에 글쓰기 같이 연휴기간 중에 딱 하루 만들어 낼 수 있는 꿀맛 같은 계획을 백지화하려니 가슴이 아프더군요.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말을 누가 제 머리에 세뇌시켰을까요?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내는데 재미를 붙여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모부와 이모님이 경작하시는 텃밭 주변은 온통 작은 언덕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저는 우선 주변 자연을 벗 삼아 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신발은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동산을 오르내리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공기가 굉장히 상쾌해서 제 폐가 한 호흡에 담지 못할 만큼 버거웠었는데요. 30분 정도가 지나니 상쾌한 공기를 제대로 마시며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걷는 것이 즐거워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면서 이어폰으로 오디오북을 들었는데 한 시간 이상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완독은 아니지만 귀로도 충분한 독서가 가능했습니다. 어쨌든 독서계획은 실천에 옮겼네요.


그다음,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보자 마음먹었습니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 날부터 친가에 가게 돼었던 저는 신났습니다만 아내는 '시'자가 붙는 곳에 가게 된 거잖아요. 아무리 잘해줘도 시댁은 시댁인 법. 그렇게 연휴가 시작되고 이틀 동안 불편해했을 아내를 생각하니, 처 외가에서 홀로 덩그러니 있는 저 대신에 저희 외가에 저 없이 혼자 제 아내가 가 있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아, 아내는 이래 본 적이 없어서 이건 좀 억울하네요. 역지사지는 실패입니다.


마지막으로 장모님과, 이모부, 이모님의 대화에 합류해 보기로 했습니다. 술잔을 주고받는 농막 안에 들어서니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고 이모부님께서는 저를 가장 따뜻한 곳에 앉히시고는 편하게 누우라고 하시더군요. 편..... 하게 누웠습니다.


이렇게요.


세 분이서 대화하시고 저는 위 사진처럼 편한 듯 불편한 자세로 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수십 번 들어 다 아는 그분들의 인생사를 들으며 장모님으로부터 한 시간 뒤에 출발하자는 약속을 받아냈건만 그 한 시간이 24시간처럼 느껴져서 잠시 자는 척도 해보았습니다.


다행히도 산 아래에 있는 곳이라 해는 생각보다 빨리 떨어져서 오후 5시에는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 밀리는 고속도로 위에서 술에 취하신 장모님의 인생 넋두리를 들으며 왔습니다. 술 취하신 틈을 타 실컷 놀려대다가 등짝 스매싱도 맞아가며, 고생하는 자기 딸한테 잘해주라는 뻔한 잔소리도 들으면서 오는 동안 오늘 내 시간, 내 하루를 허비했다는 생각은 금세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저는 오늘 오디오북으로 독서를 했고, 글감도 얻었으며, 이모님께 맛있는 커피도 얻어마셨기 때문입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장인어른과 재미있게 놀았다고 하니 오늘 계획이 다 이뤄진 셈이네요. 이제 친구 만나러 횟집에 간 아내만 얼른 집에 오길 기다리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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