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20대 중반에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큰 암흑기였어. 가만히 있으면 표정이 무섭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지. 무뚝뚝한 성격도 한몫했겠지만 딱히 웃을 일이 많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나 봐.
누군가가 환한 미소와 함께 아빠한테 베풀었던 선한 호의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때였어. 그 당시에는 세상 모든 게 다 나에게서 등을 돌린다고 생각할 때였지. 나에게는 온갖 불운이 찾아오고 행복은 떠나간다고 느끼던 시절이었어.
아무리 공부해도 원하는 성적은 나오질 않았고, 창문 하나 없는 고시원에서 몸에 맞지도 않은 매트리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한 날도 많았지.
공부할 때는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보려 스스로 뺨도 때려봤고 대화상대가 없어서 혼잣말을 내뱉기도 했어. 공무원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뼈저리게 느꼈지.
아빠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시험에서 조금 아쉬운 점수차로 떨어졌지만 더 이상 미련 없이 1년만 공부하고 접었어. 아쉬운 마음보다 이렇게 공부해서 공무원이 된들 공직사회에 제대로 적응이나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던 거야. 그리고 남은 학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학교로 돌아갔어.
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공시생 생활이 아빠에겐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시간이었어. 웃음을 잃었던 시기, 염세적으로 바뀌었던 성격,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공부방식... 여러모로 그때가 아빠에겐 암흑기였던거야.
이런 인생의 슬럼프는 너희들에게도 찾아올 가능성이 높을 거야.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곡선이지. 그걸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진적으로 우상향 하는 마음가짐이면 그걸로 충분해.
아빤 어떤 계기로 슬럼프를 극복했게?
특별한 비법은 아니고 일단 그냥 웃었어. 거울을 보며 웃었는데 어찌 그리 어색하던지... 그리고 근처 학교 운동장을 걷고 뛰었어. 그러는 동안에는 잡념이 사라지더라고. 슬럼프를 한 번에 극복한 게 아냐. 차츰 나아졌지.
나 스스로가 뭔가 변해야겠다고 느끼고 있었나 봐. 그때 당시 가끔 청취하던 KBS 굿모닝팝스에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쇼가 있었어. 홈페이지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출연신청을 했어. 전화가 오더라. 라디오 작가님 같았어. 출연할 수 있냐고. 고민도 안 하고 출연한다고 했지. 내향적인 아빠 성격에 전국으로 송출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는데 고민도 안 하고 출연하기로 했다니 신기하지 않아? 그러니까 아빠도 모르는 아빠의 내면에서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고 봐.
당시에 아빠는 부산의 한 고시원에서 살 때라 부산역에서 전날 밤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반을 달려 서울까지 갔어. 영등포 역으로 가서 그 근처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사전녹음을 위해 여의도 KBS 방송국으로 갔지.
쿵쾅대는 심장이 귀에까지 들려왔어. 방송으로만 듣던 DJ 선생님들을 만나니 긴장이 많이 되더라. 결과는 어땠을까? 얼떨떨한 상태로 맞이한 방송 출연이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그 주의 주장원이 되어 있었어. 다음주가 월장원 전인데 출연가능한지 묻는데 역시나 고민 없이 OK 했어. 그런데 여기서도 덜컥, 아빠가 월장원이 됐지 뭐야. 어안이 벙벙했지. 기장원전에서는 상대방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참패를 했지만 아빠는 부산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뭔가 후련한 기분을 느꼈어.
그전까지는 느껴보지 못한 작은 성취감이 싹트기 시작했던 거야. '하면 된다!'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해보니 되네?'라는 조그만 생각이 후련한 기분으로 바뀌면서 내 안의 막혀있던 뭔가가 해소가 됐나 봐.
다시 돌아온 고시원의 내 방과 주변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어. 하지만 아빠의 표정은 많이 밝아졌어. 그냥 당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웃기 시작한 때보다 더 밝아진 거야.
마이너스였던 나의 마음이 다시 0, 그러니까 원점으로 돌아왔어. 아빠가 욕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지? 입에 달고 살았던 욕도 이때 끊게 되었지.
웃는 날이 많아질수록 좋은 일도 많이 생겼던 걸까? 좋은 일이 많이 생겨서 웃게 되는 걸까? 뭐... 둘 다 맞겠지? 순서가 어떻든 간에 이런 순환의 흐름에 올라타려면 먼저 웃든, 좋은 일이 생기든 자신만의 사건을 생기게 해야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그래서 아빠는 그때 좋은 일은 잘 생기지 않아서 먼저 웃어봤던 거고.
지금 앞에서 재잘거리고 있는 너희들은 확실히 아빠보다는 웃는 빈도가 높구나. 앞으로도 너희들 얼굴에 웃는 날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희들의 인생에서 슬럼프가 찾아오는 시기가 있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웃어봐. 그리고 뭘 하든 작은 것 하나를 해내봐.
웃는다는 것, 그리고 작은 것 하나를 해내는 것이 나중에 큰 행복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테니 말야. 아빠도 지금 조금 더 웃어볼게. 그리고 앞에 놓인 일들을 느리더라도 하나씩 해나가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