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노동에 무너져가는 당신에게
인간은 매일 영양분을 섭취해야 살 수 있습니다. 부족해서도 안 되고 넘쳐서도 안 되죠. 그런데 매일 섭취하고 수요할 수 있는 영양분만 한계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겪고 받아내야 할 감정도 매일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어요. 하루 분량의 한계를 넘은 감정은 내일로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전 그런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 중에서도 절망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맨 앞에 둡니다. 누군가에게는 절망보다 분노가 더 크기도 할 겁니다.
Nolite ergo esse soliciti in crastinum crastinus enim dies solicitus erit sibi ipse sufficit diei malitia sua.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신약성서 마태오복음 6장 34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태오는 신앙의 삶이 실현되면 인간이 내일의 근심에서부터 해방되어 오늘을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물론 이런 해석은 어디까지나 성서적인 해석입니다.
저는 이 문장은 하루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의 임계치를 드러내 주는 말이라고 봐요. 하루에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한계치를 넘으면 겸허하게 그 감정을 내일로 넘겨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참 쉽지 않죠. 무엇 하나에 꽂히면 종일 온통 그 생각뿐이고 잠도 잘 이루지 못해요.
하지만 우리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듯 매일매일 부정적인 마음도 다음 날로 연기한다면 어떨까요? 절망, 지금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 대한 분노 같은 것들을 말입니다.
Hoc quoque transibit!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저는 힘들 때 이 말을 생각합니다.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디엔가 끝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마침표가 찍히기를 원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요.
그러니 오늘의 절망을, 지금 당장 주저앉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끝 모를 분노를 내일로 잠시 미뤄두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나를 괴롭혔던 그 순간이, 그 일들이 지나가고 있음을, 지나가버렸음을 알게 될 거예요.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그 말 그대로 기쁘고 좋은 일도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허망하죠? 하지만 그게 인생입니다.
지금을 살면 된다.
우리의 인생도 웃고 울 일들이 일어나고 또 지나가고 그렇게 반복해가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기쁘고 행복한 그 순간에는 최대한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되, 그것이 지나갈 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웃을 수 있는 순간을 위해 지금을 살면 됩니다. 힘든 순간에는 절망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내일로 미뤄두는 겁니다. 그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보는 것이죠.
세상에 지나가지 않는 것이 무엇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은 지나가고 우리는 죽은 자가 간절히 바란 내일이었을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매이지 마세요. 우리조차도 유구한 시간 속에서 잠시 머물다 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