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그런 날이 오리라 생각은 했다. 나날이 무거워지는 아이를 누구에게 맡길 순 없었다.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으니 손이 배는 더 드니까 더욱 그렇다. 이제 아이를 키울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여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아이를 들고 다닐 수 있고, 또 통제할 수 있으려면 남편이 있는 것이 나으니까.
참고로 우리 아이는 균형을 잡거나 몸을 제어하지 못해서 그렇지, 힘은 여느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발길질이나 뺨이라도 한번 맞으면 머리가 핑 돈다.
열심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는 과정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금방 끝났다. 직장인과 회사의 관계는 어느 방향이든 대체로 일방통행이기 마련인 것 같다. 짝사랑 같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 느낌도 없었고, 특별한 어려움도 없었다. 정해진 대로 아이를 데려다주고, 운동을 시키고, 의사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밥을 먹이고, 그렇게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갔다. 육아에 전념하는 하루는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처음에는 시간을 쪼개어 저녁도 짓고 집안일도 하겠다는 야멸찬 계획도 있었지만 금방 사그라졌다.
우리 부모님 시절에는 어떻게 우리를 키운 걸까? 아내와 나는 자주 궁금해했다. 막상 해보니까 정말 뼈가 빠지도록 어려웠으니까.
아, 여기서 잠깐 우리 집 자랑을 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심혈을 다해 찾은 집이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녀도 문제없도록 저층을 골랐고, 아이들이 바깥을 봐도 즐겁도록 창밖에는 길과 나무가 무성했으며,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도 막아줄 중문도 준비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벽지도 낡은 그대로 두어서 아이들이 실컷 낙서를 하고 나면 나중에 바꿀 요량이었다. 모든 선택의 기준은 아이들이었다.
비록 창밖에 쓰레기장이 보이긴 했지만 요즘 저층 아파트는 이런 일이 흔한 것 같다.
우리는 이 집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우리도 나중에 여기서 창밖으로 우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그러면 아주 행복하겠다. 그렇게 골랐던 집이다.
아이를 전담해서 돌보기로 한 뒤의 어느 날. 아이에게 밥을 먹이다가 문득 창밖을 보았다. 킥보드를 타고 가는 소년, 자전거를 배우는 소녀, 놀이터에 가자고 소리 지르는 아이, 강아지에게 손을 흔드는 학생.
왜 우리 아이는 저기에 뛰놀 수 없는 거지?
청승맞은 생각이 드는 가운데, 아이가 손을 휘저었다. 목적이 있는 움직임도 아니었고, 그래서 음식물이 든 실리콘 그릇을 엎은 것은 결코 아이의 의지가 아니었다.
바닥에 음식이 흩어졌다. 간이 약한 대신에 먹음직스럽길 바라며, 참기름까지 뿌려둔 기름진 죽이었다. 쏟아진 죽은 아이가 앉은 하이체어의 나사 사이, 바닥 타일의 틈바구니, 탁자 다리 밑의 완충용 스펀지에까지 스며들었다.
닦아도 닦아도 얼룩이 지고, 기름진 감촉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거기 비친 내 모습은 흐릿했어도 형편없어 보였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음식을 쏟은 아이에게 화를 낼 일도 아닌데 화가 났다. 가엾을 일도 아닌데 슬픔이 훅 끼쳐왔다. 나는 허공에 대고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울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밥을 떠먹지도 못한다. 눈앞의 사람의 감정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이가 활짝 웃는 것은 정말 기뻐서가 아닌… 머릿속 어느 기관과 호르몬의 작용일 뿐일지도 모른다. 어떤 증후군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그날은 유난히 절망스러웠다.
얼마 후, 아이들이 무리 없이 일찍 잠든 귀한 밤, 간만의 육퇴를 축하하며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취했다. 백순대에 맥주를 잔뜩 마셨다.
그날은 독특한 식당도 다녀왔고, 모처럼 전시도 보고 왔던 날이었다. 아이들의 반응도 좋았다. 뿌듯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서 우리는 달뜬 마음으로 잔뜩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지쳐 잠깐 정적이 흐른 뒤, 아내가 나직이 말했다.
“준이한테 잘한다잘한다 해주면 안 돼?”
그제야 돌아보니 요즘 아이에게 내가 모진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이렇게 해야지.’
‘빨리 커야지.’
‘그렇게나 연습했으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아내는 내가 종일 아이의 재활 훈련을 봐주고 있으니 왜 그렇게 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준이도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있는 거야. 오빠도 그렇고.”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있을까? 아이와 나의 감정이 어긋났던 그날 이후로 특히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내가 더 노력하면 빨리 진도를 나갈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있을까봐. 내가 한 번이라도 더 눕히고, 굴리고, 세우고, 주물러주고, 쥐어주고, 그럴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있을까봐.
재활치료도 줄이기는커녕 더 갈 곳은 없을지 찾고, 아이가 낮잠을 자지 않아 루틴이 흐트러지면 다음 운동 스케줄에 유익하지 않은 영향이 있을까봐 괜스레 짜증이 나고 조급했던, 한동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걸 알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판단으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모든 육아의 과정에는 아내가 함께 있었고, 단 한시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괜히 잊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 잃은 듯 울어보기도 하고, 갑갑한 상황에 화를 내어보기도 하고, 위로받아 힘을 내어보기도 하면서, 다시 한 번 현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신기하다. 우리 부모님 시절에는 대체 어떻게 우리를 키운 걸까? 오래전에 내가 사회초년생일 시절에 엄마가 내게 한 말이 있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한 번 견뎌봐. 6개월을 견디면 1년을 버틸 수 있고, 1년을 견디면 2년을 버틸 수 있어. “
아마 그건 꼭 직장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는 엄마도 나를 키우면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 테고, 그걸 견뎌가면서 생긴 마음의 굳은살로 버텼던 것이겠지.
나와 아내는 발달장애 아이를 육아하는 2년 차의 고비를 또 한번 넘겼다. 또 한동안은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