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기에 병원에 다닌다는 것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또 우리는 떨어져 있었다.
상황은 이러했다. 준이는 꽤 자주 울었는데, 울다 보면 얼굴이 시뻘게지다 못해 까매질 정도였다. 아직 백일도 되지 않은 아기는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굴이 까매질 정도로 울고 나면 숨을 멈추듯 하고 눈이 풀리더니,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다행히도 호흡이 돌아오면 이내 얼굴빛도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자칫하면 위험할 만한 발작이었다. 그래서 준이가 우는 것은 우리에게 항상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한편으로 우유를 먹다가 사레드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다. 입으로 빨아들이기는 하는데, 행여나 기도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폐렴으로 NICU에 들어가 있던 기간은 3주가 넘었다. 그 후유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러다보니 늘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달고 있었다. 아내가 젖병을 물리면 나는 옆에서 산소통을 들고 대기했다. 산소포화도가 90 이하로 떨어져 경고음이 울리면 나는 준이의 코에 대고 산소를 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세 저산소증에 빠질 수도 있었다.
이 두 경우가 합쳐지면 그야말로 우리에게는 대환장 쇼였다. 그러니까, 젖병을 물고 빨아먹다가 사레라도 들리면 기도가 막히는 느낌에 괴로워 울고, 울면 얼굴이 까매질 수도 있고, 그래서 아내는 준이의 낯빛이 안 좋은 기미라도 보이면 발을 동동 구르며 달래고, 나는 산소통을 들고 쫓아다니면서 산소를 쏴 주는 그런 식의… 그런 수유 시간이 서너 시간마다 반복됐다. 신생아가 그렇듯 낮과 밤의 구분도 없었다. 이러다가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면 정말 큰일인 거였다.
입이 방정이지, 말하기 무섭게 감기에 걸렸다. 열이 40도 가까이 무섭게 올랐고, 가래를 스스로 뱉어낼 줄 모르는 준이는 또다시 눈에 띄게 숨을 쉬기 어려워했다.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다급히 병원을 찾았다.
그때는 여전히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 조치가 엄격하던 시기였다. 보호자는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한 명이 달래고 한 명이 산소를 대어 주는 등 보조를 하는, 2인 1조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특히 그게 필요했다. 하지만 코로나 방침은 엄격했다. 결국 나는 아내에게 아이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날 밤 우리는 화상통화를 켜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아내는 밤새 아이의 열을 살피고 맘마를 주고 심하게 울지 않게 달랬다. 이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조마조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실제로 이때 썼던 일기들을 보면 정돈되지 않고 다급함이 느껴지는 글로 가득했다. 그때는 일기라기보다는 아이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타임라인대로 기록해 둔 의료 기록에 가까웠다. 나는 강박적으로 그렇게 적었다. 그래야 의사 선생님께 정확한 증상을 설명하고 답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 기록과 함께 슬픔과 아쉬움의 토로도 가득하다.
이틀째 되는 날, 아내는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밤새 혼자 모든 시간에 아이를 돌보니 피로가 빠르게 쌓일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둘이 돌볼 수라도 있었는데, 병원에서는 오롯이 혼자의 일이었다. 아내는 준이를 안고 복도로 나왔다. 나는 엘리베이터 공간에 있었다. 우리는 유리벽을 두고야 간신히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입장할 수 없었으니까. 잠시 후에 회진이 시작될 테니, 그때 우리의 사정을 한번 더 얘기해 보자. 그 정도의 계획만 짰다. 다시 아내는 아이를 안고 병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 후, 병실 앞을 지나가던 수간호사가 우리 아이가 있는 병실을 들여다보더니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이어 다른 간호사들이 급히 뛰어 들어갔다. 처음 보는 기계를 끌고 들어가는 간호사도 있었다. 이쪽에는 가끔씩 통행이 가능한 사람이 출입문으로 지나다녔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병실 안에서부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문이 닫히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정말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발을 떨었다. 여차하면 다음번 출입문이 열렸을 때 뛰처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머릿속에서 맹렬히 부딪쳤다. 육아를 시작한 이후, 이렇듯 이성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 자주 올 줄은 몰랐다.
잠시 후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나왔고, 그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원망했던 출입문이 다시 열렸다.
“괜찮아요. 아내분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아이는 안정됐어요.”
그 말에 맥이 탁 풀렸다. 간호사는 아내의 요청에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았는지 잠시 들어가서 상황을 함께 보도록 도와주었다. 들어가보니 아이에겐 그렇게도 다시는 끼지 않길 바랐던 산소줄이 꽂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헤어졌는데, 그 사이에 아이가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몸이 활처럼 휘고 굳었다고 했다. 하지만 빠르게 기계를 가져와서 산소를 공급해 나아질 수 있었다.
이토록 아슬아슬한 일이 반복되는 동안, 아이를 돌보는 아내의 심신도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다행히도 회진이 시작되어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에게는 폐렴뿐 아니라 경기가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며칠 더 두고 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간곡한 부탁과 따듯한 배려가 몇 번 오간 뒤, 우리는 1인실을 이용하는 대신 나까지 함께 들어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대신 코로나 거리두기를 지키기 위해 나는 병실에서 나오지 않는 것으로 했다.
그게 새해 첫날이었다. 입원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병원은 고요했다. 어느 정도의 배려가 가능한 때와 운이 맞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병원에서는 가능한 최대치의 배려를 해준 것이고,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깊이 감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