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LEBREAKER 31. 일리네어 레코즈
코로나 19가 세상을 덮치기 한참 전, 명동이든 강남역이든 돌아다니면 '너와 나의 연결 고리! 그건 우리 안의 소리!'라는 노래가 길거리를 둥둥 떠다녔다. 쿵쿵쿵 울리는 베이스 소리는 여름마다 TV에서 쇼미더머니라는 이름으로 찾아왔고, 갑자기 엄청나게 많아진 힙합 페스티벌에서도 울려 퍼졌다.
나도 힙합을 즐겨 들었다. 영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 로비를 지나 버스까지 타고 집에 도착했지만, 야근이 이어지던 매일. 그 시절 우리 팀원들의 육체에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주던 노동요는 빈지노, 도끼와 더콰이엇의 노래였다. 다 퇴근한 빈 사무실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일할 때면 이상한 쾌감이 있었더랬다.
빈지노의 '나이키 슈즈'부터 시작해서, 도끼와 더콰이엇까지 함께 부른 '가'를 들을 때면, 괜히 나도 가사에 나오는 롤스로이스나 람보르기니나 페라리 같은 차가 있는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알지 못하는 기분을 알 것만 같은 개념은 궤변이래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난주 갑자기 일리네어 레코즈가 해산했다. 시간문제일 것 같았던 일이었지만 마주하니 마음이 얼얼했다. 9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도 그들이 말하는 자신의 재능 하나만 믿고 달려 성공하고, 롤렉스를 차고, 슈퍼카에 올라탄 기분은 모른다. (아시는 분은 댓글로 기분을 나눠주세요.)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일리네어 레코즈라는 조직은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혁신적이었고, 어쩌면 미래형 조직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것.
빈지노, 도끼 그리고 더콰이엇. 일리네어 레코즈라는 이 멋이 폭발하는 세명이 내게 알려준 건 단지 슈퍼카를 가진 듯한 환상적인 기분만이 아니었다. 죽어라 일하고 회사에 엄청난 매출을 올려도, 내 월급은 지난달과 정직하게 다를 바 없던 회사원 시절. 어차피 내 인생에 머니 스웩(요즘 말로는 FLEX) 같은 건 없을 테지만, 일리네어 레코즈가 만든 이윤 창출 시스템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일리네어 레코즈는 특별히 사장님이랄 게 없는 특이한 구조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빈지노/도끼/더콰이엇은 일리네어 레코즈 소속이되 각자 하고 싶은 음악과 창작활동을 이어간다. 본인에게 필요한 스태프 인력은 서류 상은 회사의 이름으로, 하지만 본인이 가장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들과 제약 없이 계약한다. 활동으로 얻어진 총수익에서 스태프나 업체에게 지불할 대금을 빼고 난 순수익은 본인이 90% 정도를 갖고 10%는 회사 법인에게 재투자한다. 함께 하는 활동도 마찬가지 구조다. 순수익은 나눠갖고, 일부만 회사에 재투자한다.
이쯤에서 장도연의 표현을 빌리고 싶다. 그냥 아방가르드하고 굉장히 자유분방한 이 예술적인 시스템. 일리네어 레코즈 안에서 개인의 역량, 자유, 수익은 최대화된다. 왜냐, 사장님도 조직원도 없어 고정지출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순수익에서 일리네어 레코즈로 재투자했던 비용으로 외부의 세무/법률자문을 받거나 사무실 유지비로 쓰인다. 대신 회사의 덕은 톡톡히 본다. 회사 대 회사 간 이루어져야 하는 큰 계약이 좋은 예다. 뮤지션 한 명이 콘서트 홀 계약할 때보다, 회사 법인으로 계약하는 편이 훨씬 안정감 있다.
요컨대 일리네어 레코즈는 인디펜던트 워커의 미래지향적인 어떤 형태이었다. 세상에 없던, 회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모두 깬 이 무엇. 회사인 듯, 회사 아닌, 회사 같은 이 조직(이란 말보다는 크루가 어울릴까).
프리랜서 또는 인디펜던트 워커 (내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탈회사형인간)으로 일해본 사람들은 알 거다. 특유의 자유로움과 '벌면 다 내 거'인 수익구조는 매우 좋지만, 내가 쉬면 모든 게 멈춰버려 불안하다. 출근도장을 찍어야 하는 회사는 아니라도, 적어도 같이 활동하는 크루나 유닛 같은 뭐라도 있으면 시너지도 날 텐데 하는 갈증이 늘 있다. 따로 또 같이 일하는 일리네어 레코즈 같은 형태라면, 이런 고민은 (개비스콘 광고처럼) 싸악 해결된다.
꿈도 야무지던 월급쟁이 시절. 일리네어 레코즈의 노래로 노동요를 틀어주던 후배에게 제안했더랬다.
"우리말이야. 업계에서 몇몇 에이스만 딱 모아서, 일리네어 레코즈 같은 회사를 차려보는 거야. 컨설팅 작은 건 혼자 하고, 큰 거는 뭉쳐서 하고. 수익의 90%는 우리가 먹고, 10%는 회사에 재투자하는 거지."
슬프게도 후배는 욕심은 굴뚝같지만, 자신은 중간만 가고 싶댔다. 결국 안정적인 삶을 향해, 다른 회사로 이직한 후배와 다르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일리네어 레코즈가 보여줬던 조직 시스템을 표방하며 일하고 있다. 뉴프레임코웍스라는 큰 테두리를 하나 쳐두고, 출근도 퇴근도 휴가도 모두 자유롭게 정하고, 다양한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것이다. 일상에 녹아있는 사소하지만 시대착오적인 고정관념을 바꿔 나아간다는 목표 하나로.
인디펜던트 워커의 시대다. 긱 이코노미라는 말이 생겨난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일이라는 개념이 또 빠르게 변태 한다. 직장을 다니던 시대는 없고, 직업으로만 남는 시대. 독립적으로 일하며 자유와 생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시대. 앞으로 이런 연대감으로만 묶여있는 조직은 점점 더 많아지지 않을까. 이상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번 힙합 레이블이자, 레전드로 남을 실력자들의 합이자, 혁명적인 경영형태를 보여준 혁신의 역사를 기념하며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