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5. 어쩌면 가장 고난도의 싸움, '즐기며 살기' 스킬 획득
퇴사 전 나의 마지막 직급은 차장, 직책은 팀장이었다. 나이는 35살. 직속상관없이 마케팅 부서를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큼직한 회의 때에는 40~50대의 부장님, 이사님들과 나란히 앉아 밀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처음 팀장을 단 것이 30대 초반이다. 15명 정도가 되는 팀원을 이끌어야 했다.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쫓겨 악착같이 일했다. 팀에서 한 번도 엄두도 내지 못한 프로젝트도 수주했고, 우리 팀은 실적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 팀원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삶에는 저마다의 우선순위가 있음을 잊은 나 때문이었다. 가족, 학업, 취미, 여가가 일보다 먼저인 팀원들은 그렇게 지쳐갔다. 이제와 돌이켜본다. 과연 나는 행복했을까? 일을 사랑했지만, 도저히 못해먹겠어서 결국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는가.
나도 한 때는 인턴이었다. 사원이었고, 대리였다. 처음 출근하던 날에는 선배가 시킨 양면 복사를 실수할까 봐 벌벌 떨었다. 몇 번이고 확인해도 실수가 생겨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자료 조사 맡은 부분에 틀린 것이 있을까 봐 옆자리 동기에게 자꾸만 물었었다.
팀장이 뭐라고, 회사에 보여줘야 하는 게 뭐라고.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의 고충을 '목표 달성'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했다. 나는 내 팀원이 지각을 하건, 갑작스러운 휴가를 쓰건 모든 것은 자율에 맡겼다. 대신 일에 대해서는 아주 날카롭고 타협 없는 기준을 제시했다. 팀원들은 그런 기준을 채우기 위해 애를 쓰다가 늘 지쳤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나는 '목표'에 짓눌린 그대로였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나라고 예외가 없었다.
'와, 나 진짜 인정사정없는 팀장이었네...'
통렬한 자기반성의 시간 이후에 '부끄러움'이 찾아왔고, '겸손'의 중요성이 뼛속으로 스몄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날 따라와 준 팀원들에 대한 지난 기억에 '감사함'이 스몄다. 이제 과거의 영광은 감사함으로 포장해서 저 멀리로 보내야 할 때다.
회사만 그만둔다고 탈회사형인간이 되는 게 아니었다. 실행보다 지시가 익숙했던 시간, 과정보다 목표가 중요했던 위치를 어느 정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했다. 지난날 받았던 월급, 사람들이 불러주던 내 직함, 어느 프로젝트를 저렇게 잘 진행했었다니 하고 사람들이 보내주는 인정. 전부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왕년에 잘 나가지 않았던 사람이 어딨겠는가. '나 이거 할 줄 아는데, 이렇게 해봤을 때 잘 됐었어'라는 생각부터 다 버려야 했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자율적으로 살고 싶어서, 숨을 쉬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가 강요하는 시간표대로 살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일을 재밌게 추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왜 여전히 나는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에 얽매어있나.
'그래, 재미가 있어야지. 내가 즐겨야지.'
'하고 싶은 것'과 '할 줄 아는 것'의 접점으로 '가치소비 브랜드 런칭'이라는 결과를 냈었던 메모를 다시 꺼냈다. 메모는 다 잊어버리고, '할 줄 아는 것'에 허우적거리던 나를 구조할 시간이다.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는 '하고 싶은 것'들을 되찾아 올 시간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부터 지우자. 내가 만족할만한 것을 하는 게 중요한 거야.'
기억을 떠올려보면, 일이 가장 재밌었던 건 '인턴' 때였다. 돈은 가장 조금 벌었지만, 실수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때였다. 사람들은 말한다. 30대 중반이 되면 직장에선 중급 이상의 위치에 오르고,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런 건 다 누가 정했단 말인가?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닌데, 그런 기준대로 살아야 행복하다는 건 누구 논리인가?
나는 나대로 살자. 이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뭔가 제대로 초점이 맞는 게 느껴졌다. 먹고사는데 중요했던 회사도 필요 없다며 나왔는데, 사회적인 통념이 뭐 대수라고. 탈회사형인간으로 살기에 3년 정도의 자금이 있으니, 이 3년 동안은 뭐든지 즐길 수 있는 것. 내가 즐거운 것으로도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 결론 끝에 선보인 소규모 프로젝트는 소위 말하는 '중박' 정도의 성공을 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행복'과 '재미'를 남겼다. 진행하는 내내 가슴이 뜨거워졌고, 눈물이 글썽여졌다. 나는 처음 번 돈으로 나를 응원해준 친구를 불러 치킨과 맥주를 샀다. 워런 버핏 안 부러운 순간이었다. 잊고 있던 삶의 소소한 재미와 감동이 다시 마음에 일렁이기 시작했다. 치킨을 베어 물 때 심장이 마구 뛰고 눈물이 글썽여졌다. 이제 재미없는 삶을 살기는 죽기보다 싫어졌다. 다시 한번 다짐했다.
'회사라는 시스템으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틀 내내 지난 글의 반응이 뜨거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글은 퇴사의 맘이 굴뚝같거나, 이미 패기 있는 퇴사 후 방황 중에 계신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면, 저 역시도 아직 방황 중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회사 다닐 때만큼 돈 잘 벌지도 못하잖아'
'맨날 번아웃과 파이팅을 오고 가는 사람 아니야?'
'결혼 안 했으니까 저러고 살지'
'속도보다 방향'이라는 꼬리말을 지난 회차에 남겼지만, 그 후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즐거운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기대, 타인의 기준, 타인의 시선을 벗어버려야 비로소 '즐거운 방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어렵습니다만, 어차피 그렇게 저를 평가하는 남들은 저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걸 계속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