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가 스며든 일상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
나는 시니어 전문강사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퇴사를 강행하고 뛰어든 길인데, 많은 이들은 행복을 찾기 위한 도전, 봉사와 사랑 실천의 멋진 청년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난, '부'라는 거대한 거인이 '부'하며 내민 입술 앞에 내 입술을 갖다 붙이고 싶어 안달, 발정 난 30대일 뿐이다. 어르신들의 순수한 마음이 주는 온기도 자본주의의 냉혹함 앞에서 얼어붙는다. 시커먼 나의 속마음을 그들은 알까? 힘없고 느리지만 매번 내미는 노인들의 따듯한 손길은 애처롭다.
인천 계양구에 있는 요양원, 노래교실이었다. 휠체어와 의자에 늘러 붙어서 쪼르르 진열되어있는 바싹 마른나무들. 손주뻘 되는 나의 재롱 부림이 흥겨웠는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손들을 흔든다. 음악에 맞춘 그들의 파르르한 호응 속에 참새가 되어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묵어.."
한 할머니가 작은 목소리보다 더 답답한 손길로 조용히 건빵 두 개를 내밀었다.
"아~"
내 입 앞으로 잽싸게 건빵이 배달된다. 선물을 품고 참새가 오기만을 기다린 나무는 행복했으리라. 먹고 싶지 않았지만 기대에 부푼 어르신의 눈망울을 못 이겨 얼떨결에 삼켰다. 푸석한 모래알들이 입안 가득 차올랐지만 나는 프로다.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 뒤뚱거리는 익살스러운 리액션으로 모든 이들에게 웃음을 심는다.
노래가 시작되자 건빵을 주었던 그녀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방에 가더니 간주가 흘러나올 즈음에 다시 힘겨운 걸음으로 나왔다. 할머니의 작은 손에는 이번에도 건빵이, 그러나 봉지째 들려있었다.
"(헐.. 그건 아니잖아요.. 제발..)"
순간,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지각변동은 수업 내내 말라있었던 등줄기를 적셨지만, 촉촉했던 내 입속에는 극심한 가뭄을 일으켰다.
이상 기후를 느낀 참새는 마른나무들을 뒤로한 채 자신의 보금자리로 날아가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재빠르게. 살기 위해서.
내 얼굴에 드리워진 당혹의 그림자를 보았을까, 그녀는 이번에는 입이 아닌 내 손에 건빵봉지를 쥐어 주셨다. 요양원 어르신들이 '은밀하게 간직해 온' 간식이라는 것은 의미가 크다. 그것은 나이 든 어미와 함께 늙어온 적금통장이며, 누군가에 대한 빛바랜 그리움이며, 아직도 나로서 세상에 존재함을 알리는 희미한 방울소리다. 조금씩 굽어가는 앙상한 나무들이 오늘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뿌리와도 같은 것일 '그것'을 나는 받은 것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을까. 절대 녹지 않을 것 같은 얼음의 마음 한 구석에서 불꽃이 튀고 있음을 느꼈다.
수업이 마무리되고 아까 받은 건빵 한 봉지를 허름한 검은색 토트백 속에 깊숙이 구겨 넣고. 허겁지겁 내 장비들을 챙기는 중이었다.
"이 년이야!! 이 년이 그랬어!! 이 나쁜 년이.."
내게 사랑을 베푼 그 할머니가 시뻘게진 얼굴로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어르신에게 이번에는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증오를 베풀고 있었다. 역시 싸움구경인가. 보호사들, 어르신들, 이 마을에 사는 사람 모두가 이쪽에 관심을 가졌는데, 춤추고 노래하는 내내 반응이 없던 어르신들도 이 호통 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정작 욕을 한 바가지로 먹고 있는 할머니가 지금의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처럼 화를 내는 이에게 부채질을 하는 격이었다. 불이든 싸움이든, 모든 이들의 눈과 관심을 사로잡은 할머니에게 나는 한 수 배워야만 할 거 같았다.
분노의 원인을 듣자 하니 건빵 한 봉지를 룸메이트 할머니에게 도둑맞았다는 것이다. 누명을 쓴 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할머니는 아직도 눈만 꿈벅거릴 뿐이었다. 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눈은 평화롭고 고요하다. 아등바등 살고 있는 내가 진짜로 배우고, 가지고 싶었던 것은 삶을 대하는 이 평온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아등바등 살고 있는 내가 진짜로 배우고, 가지고 싶었던 것은
삶을 대하는 이 평온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몇 년 전에 보았던 인상 깊은 영화, '장수상회'가 떠올랐다. (아주 강력한 스포가 있으니 영화를 보고픈 이들은. 죄송합니다.) 치매에 걸렸지만 정작 자신이 치매인 줄 모르는 아버지이자 남편인 '성칠'(박근형 분)에게 가족을 포함해 온 동네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그의 생각과 기억에 맞춰, 속이고 속아주는 한 사람을 위한 몰래카메라, 감동 대작전이다.
"어르신, 제가 도둑 잡았어요! 건빵도 찾아왔어요! 이제 안심하세요."
할머니의 손에 재빨리 과자봉지를 쥐어 드렸다. 그녀는 손에 잡힌 그것을 한참을 바라보고 만지작 거리다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환하게 번지는 미소는 내 마음에 꽃씨처럼 박혀서 작은 뿌리를 내렸다. 차가운 얼음은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건빵 한 봉지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은밀하지만 강력하게 많은 것들을 파괴하는 치매라는 괴물에게도 쉽게 잠식당하지 않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어려운 개념도 알 것 같은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 멀리 조용필 아저씨의 멜로디도 밀려와 바위 같은 내 머리에 철썩 부딪힌다.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혹여 잊으면 안 되는 소중한 것들을 지금 우리는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