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을 넘으면
봄이 오자 팀에 있던 파견직 비서가 다른 부서로 발령 나면서, 나는 자연스레 비서 겸 경리 업무를 떠맡게 되었다. 회계에 ‘ㅎ’도 몰랐던 내가 차변과 대변을 배우고, 재무제표와 계정별 특징을 익히며 월말 마감까지 하게 된 것이다.
4대 보험료를 계산하던 어느 날, ERP 사용에도 익숙해진 나는 잠시 여유가 생겨 데이터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때 내 급여가 회사에서 가장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년제 졸업이라는 꼬리표가 나를 기본급부터 낮춰놓고 있었다. 그제야 4년제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여름 무렵, 나는 모대학에 편입해 2년 뒤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계약직과 정규직, 2년제와 4년제. 표면적으로 가려져 있던 회사 안의 계급이 얼마나 분명한지를. 나는 그 질서의 맨 아래에서 버티고 있었다. 버티고 버티면 하루가 채워지고 언젠가 성공을 맛보고 있을 줄 알았다. 누군가 내게 던진 말을 새겨 들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와 15살 차이나는 계약직 선배 M이 내게 남긴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맴도는거 같다.
나는 직원의 복리후생을 담당했기 때문에 급여 일을 하는 M과 마주할 일이 많았다.
M은 3개월짜리 단기 아르바이트로 입사해, 10여 년 간 쌓은 경력을 활용해 계약직이 된 케이스였다. 그는 업무를 정확하게 처리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나에겐 은행일, 복사, 팩스, 김밥 셔틀, 물 떠주기 등, 자신보다 어린 대리, 과장에게 감히 시킬 수 없는 것들을 사원인 나에게 시켰다.
한 번은 건강보험료 요율을 변경하려 표를 작성하고 확인받으려다, M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내게 던져진 서류 뭉치가 내 주변으로 촤르륵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때 다른 동료들의 안쓰러운 눈빛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M을 상대하는 게 긴장 되어 모르는 게 생기면 다른 대리에게 묻곤 했다. 하지만 M은 나를 예뻐한다는 이유로 종종 술자리와 개인적인 참견을 강요했다. 내 연애 문제까지 관여했고, M의 기운은 나의 애인에게까지 전이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40, 지금은 53이 되었을 것이다. SNS를 보니 여전히 혼자인 듯하다. 어쩌면 그녀는 나보다 더 혹독한 시절을 견뎌왔을지도 모른다. 계속 이렇게 살면 나중엔 나도 M처럼 후배를 막대하는 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쌓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늨 M 덕분에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게 잘하고자 노럭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술자리에서 M이 한 말이 떠올랐다.
“너는 나처럼 허송세월 보내지 마.”
이 사람처럼 나이들지 말자는 다짐을 주는 사람도 내게는 귀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