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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곰씨 오만가치 Jan 12. 2024

하마터면 열심히 일할 뻔했네

무모하게 덤벼들지 말자

 탁탁, 탁탁탁..


  저녁을 먹고 자리에 앉아 오후에 하던 일을 마저 한다. 저녁 이후의 시간은 웬만하면 업무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코딩이라는 건 글쓰기와 비슷해서 하다가 관두면 문맥을 잃어버린다. 어쩔 수 없이 계속 코드를 이어간다. 하다 보니 이런저런 에러와 만나 끙끙대다가 아차 싶어 시계를 보니 벌써 7시가 넘고 있다.


 '아, 오늘은 책 한 자도 못 읽겠네. 그냥 멈추고 책 볼까?'


  화면을 쳐다보며 잠시 머뭇거린다. 에이.. 하던 거 마무리 해야지라는 생각에 다시 키보드를 두드린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니 8시가 다 되어 간다. 오늘 독서는 여기까지. 내일도 있으니까라며 자신을 달래며 업무 일지를 작성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남아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일만 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않으니까 관련된 업무 또한 나에게까지 공유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공유되지 않는다는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고 굳이 나서서 챙길 이유도 없다. 그냥 지나가다 훈수 한번 둘 뿐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팀장 자리에 앉았으니 공유되는 메일이 점차 늘어난다. 대부분이 관련 없다고 잡아떼도 괜찮을 일이지만 그래도 한 번은 들여다보게 된다. 회사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아 둬야 나중에 바보가 되질 않기 때문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하는 것에 큰 부담은 없었다. 회사가 자꾸 건조하게 나오니까 같이 건조해지는 거다. 서로 좋은 게 좋을 때야 알아서 뭐라도 하고 양보도 하곤 하지만 서로 대치하기 시작하면 좋지 않다. 특히 회사가 직원에게 빡빡하게 굴면 직원은 악착같이 군다. 그것만으로 분에 차질 않으면 일을 적게 하기 시작하고 결국엔 회사를 떠나게 된다. 요즘 퇴사 레퍼토리는 딱 이렇다.


  그래도 일이 떨어지면 일단 열심히는 하게 된다. 일을 하든지 회사를 나가든지의 문제가 되겠지만 작년 이맘 때도 그랬다. 내 일을 하러 왔다가 다른 일을 하게 된다. 단지 할 수 있다는 이유다.




  주말을 열심히 보내고 새벽에 일어나서 피곤한 날이었다. 왕복 9시간의 운전을 해서 그럴 수도 있다. 움직일수록 피곤한 그런 날이었다. 평소보다 무거워진 몸과 뭔가로 가득 찬 느낌의 안구가 불편했다. 게다가 약간의 감기 기운으로 몽롱하기까지 한 그런 나를 보며 정 과장이 말한다.


 "20일까지 마무리해달랍니다"

 "그렇게 중요하면 직접 와서 하라 그래. 미쳐 가지고. 난 못한다 그래"

  몸이 힘드니 짜증도 쉽게 났다. 평소만큼의 자제력은 이미 내겐 없다. 그건 이런 일이 일상인 정 과장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요즘 계속 이런 식으로 통보합니다. 시간은 앞에서 다 까먹고 '난 모르겠다'며 맞춰달랍니다"


  내 일도 아닌데 확 배 째라 할까? 안 그래도 피곤한데 다짜고짜 일정 지키라고 하니 화가 났다. 조직 사이에 퍼져버린 이기주의는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나 몰라라 한 일은 결국 마무리를 맡은 팀에게 쏟아졌다. 아무리 욕을 해도 바뀌지 않았다. 이미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초격차>에서도 부서 간 이기주의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는데. 소니도 이것 때문에 망했는데.


  조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땐, 결정권자가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얘기했다. 아니, 그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읽어 보긴 한 거야? 왜 좋아하는 건데?라는 생각에 화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이 따위로 만들어 놓고 일정 지키라고? 그렇게 중요한데 코 빼기도 안보인다고? 아주 미쳤구먼."


  나의 짜증에 정 과장은 기분이 괜찮아지는 모양이다. 최고의 공감은 역시 같이 욕하는 거다. 욕을 뱉으면서도 일은 해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고 펑크 낸다고 좋을 것도 없다. 다들 알고 있는 건지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것을. 그게 나인 게 짜증 날 뿐이었다.


 "난리가 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면서도 묘하게 불안하다. 이슈를 잔뜩 적어 보냈다. 너네가 원하는 걸 하기 위해서는 정말 큰 산을 넘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또 그래야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이방인이고 이해관계가 엮여 있는 팀도 아니다. 그리고 부장이었다. 짬밥은 거저먹는 것도 아니고 힘도 있다. 이런 상황을 견디다 퇴사하는 애들에게 미안했다. 원래부터 윗 사라들이 해줘야 할 일이다. 지금은 우산이 없다.


  부장이라고 위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일은 그래도 해야 한다. 사실 나는 이런 행동이 적성에 맞지 않는 81%의 'I' 니까. 그래도 가끔 미칠 필요는 있다. 상무까지 현장으로 좇아 왔지만 당당하지 못할 거 없지. 이런 지경에 어떻게 해내라고 하는 겁니까? 라며 대든다. 그래서 할 수 있냐 없냐만 계속 묻는다. 모든 건 시간의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대들었으니 그 대가로 해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밤을 꼴딱 새웠다. 디데이니까. 여럿 사람 당고 밤을 새웠다. 3개 중에 2개를 해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눈을 잠깐 붙인 뒤에 해보고 안되면 고객에게 설명할 생각이다. 똑같은 걸 왜 다 보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 나머지 한 개도 마저 완성했다.


 '하아.. 나란 남자'


  같이 밤을 새운 정 과장이 가장 고생이 많았고 한때는 부사수였던 두 명이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일단 스스로를 칭찬하며 피곤을 달랬다. 긴장과 희열은 마약 같아서 힘들 때 큰 약이 된다. 가끔은 중독되기도 한다. 나머지는 담당자에게 맡겨두고 공장 한편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고객이 돌아간 뒤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헤어졌다. 졸음이 몰려와 쉽지 않은 퇴근길이었다.




  옛 생각이 잠시 났다. 지금도 그렇게 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면 회복되던 몸은 이제 일주일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다. 어쩌면 '적당'이라는 말이 필요한 나이다. 꾸준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리하면 안 된다. 지치면 그대로 넉다운이다. 훌훌 털고 일어날 정신력은 있지만 체력이 없다. 그래서 적당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꾸준한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다. 너무 열심히 일하면 오히려 좋지 못하다.


  워크홀릭이 쉼 없는 삶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는 게 안타까웠던 시절이 있었다.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은 워크홀릭이었고 워크홀릭 없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고 즐기는 자는 미친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미치면 죽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워크홀릭이라는 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인 것 같기도 하다. 옆에서 보면 워크홀릭 같지만 그 사람이 즐겁다면 그건 워크홀릭이 아닐지도 모른다. 결국 능동적이냐 습관적이냐의 문제로 귀결될 뿐이다. 무언가를 잘하고 싶은 그런 순수한 열정에서 나오는 정신력과 번뜩이는 아이디어. 한때 나도 중독되어 있었다.


  일은 주도적으로 해야 행복하다. 남이 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답답하고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일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면 정말 행복한 상태인 거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면 자신이 먼저 주도해야 한다. 쉽고 어렵고, 편하고 힘들고를 따지다 보면 결국 남는 일만 해야 한다. 그런 일은 마음이 더 힘들다. 주도권이 뺏긴 업무는 책임과 능동 모두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제는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체력이다. 건강이다. 체력 없이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다. 하루의 일부분을 떼어내어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인위적인 작업이 필요한 나이다. 그러다 보면 젊은이들보다 짧은 시간을 사는 느낌이다.


  나이를 잊고 열심히만 일한다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러면 곤란하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으니까. 그래도 알아차려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일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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