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지만 성장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그렇다고 <데미안>을 해석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알' 속과 밖의 경계가 있다는 점이고 그 경계를 허물기 전까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다.
얼마 전, "책을 읽는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지인에게 책을 읽어 뭐 하냐"라는 핀잔을 들었다는 글을 읽었다. 내 친구 같았으면 바로 씹어 먹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책 읽는 사람에게 핀잔을 줄 수 있다니 대단한 용기다. 그 점은 인정한다.
나는 독서의 주된 목적이 지식 획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얼마 전까지는 나도 그랬다). 그것은 주입식 교육과 정답을 풀어내는 입시 과정을 겪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흔한 편견과 같다. 그래서 지식을 다루지 않는 듯한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온통 '돈'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돈'과 직결되지 않는 것을 다루는 책은 쓸데없는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빨리빨리'의 조급증마저 있어 바로 효과가 나질 않으면 참지 못한다.
돈에 진심은 이 나라의 사람들은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 센터에서 조사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돈'이라고 꼽았다. 대부분의 나라가 '가족'을 뽑은 것에 비하면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돈'이라고 한 나라는 이 나라가 유일하다. 물질 만능주의가 된 것인지 욕망에 솔직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독서를 폄하하는 사회적 태도를 설명하려고 하다가 너무 멀리 간 듯하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단숨에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잘 없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거나 운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가치 있는 것들은 오랜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가치라는 것이 주관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 공들인 것이 개인에게 가치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성장'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뭔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변화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고 당장 똑똑해지지 않고 운동을 시작한다고 바로 살이 빠지지 않는 것과 같다. 레슨을 몇 달을 받아도 실력이 제자리걸음인 운동도 있다.
이런 성장을 '계단식 성장'이라고 한다. 변화가 없는 구간을 견디면 어느 날 갑자기 도약하는 날이 온다. 어떤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고 만족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채워져서 그럴 수도 있다. 게임을 예로 들자면, 좋은 아이템을 착용하려면 힘, 민첩, 체력, 마력 등의 요구 사항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 레벨업을 할 때마다 차곡차곡 스테이터스를 채워나가 마지막 조건까지 만족하면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게 된다. 그 아이템을 착용하면 바로 엄청나게 강해진다. 인생의 성장은 대부분 이렇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게임 얘기가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사람들은 게임은 재밌어한다. 왜냐면 몹을 한 마리 잡을 때마다 정확한 성장 수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자신의 능력과 비교해서 최적의 사냥 장소를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이 확실하니 노력을 쏟기에도 어려움이 없다.
다시 독서 얘기로 돌아와 보면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배움이라는 건 늘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 '아!' 하는 날이 온다. 그것을 '돌 틔는 소리'라고 웃어넘기지만 배움의 레벨 업하는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알 속에 있다(탈피하는 동물에 비교하는 것도 좋다). 우리는 알을 깨고 나오기 전까지(혹은 탈피를 하기 전까지) 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끊임없이 부리를 쪼는 행위를 해야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다. 독서는 바위에 대고 정을 치는 석공과 같은 작업이다.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 깨우치는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큰 바위를 다루고 있는지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를 뿐이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시대다. 하지만 삶이란 연속의 연속이며 결과라는 건 그 과정의 이정표 같은 것일 뿐이다. 그것을 향해 힘을 다하는 과정만 있을 뿐 완결은 없다. 조금 더 나아지려(그것이 능력이든 행복이든)는 과정이야 말로 삶 그 자체다. 독서 또한 그런 과정 중 하나이고 이미 그 자체로 의미 있다(모든 몸부림은 의미가 있다).
ps. 정말 애매모호한 글이다. 나도 아직 배움이 한참 더 필요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