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들은 걱정이 많으시다.
설날 직전에 확진을 받는 바람에 입원이 연장 됐다. 확진받으면 바로 퇴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친가와 외가를 딸과 둘이서 가야 하는 것이 조금 난처했다.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걱정하시는 어르신들인데 입원까지 했다고 하면 어떨지, 희귀병이라고까지 얘기는 못한다. 그래서 일단 장이 좋지 않다고 얘기하기로 했다.
"아들이 입원해서 이번에는 설날 아침에 딸이랑 둘이 갈게요"
가볍게 얘기한다고 했는데, 어머니의 반응은 강하다.
"왜? 건강하더니, 애가 뭘 잘못 먹었나? 왜 입원까지 했노?"
"크다 보면 아플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너무 걱정 마이소"
"아이고... 애가 왜 아플꼬..."
예상대로 어머니는 입원이라는 말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기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내는 형수에게 연락해 사정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냥 아픈 걸로 하기로 했다. 여행 간 누나에게는 돌아오면 얘기하기로 했다. 누나는 우리 집의 해결사이기도 했다. 다음 일은 누나와 상의해야 한다.
손주 맛있는 거 챙겨주려고 했을 텐데 못 먹는 거 먹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유 없이 안 먹이는 것도 이상하니 일단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누나와 매형은 부모님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 의사니까 안심시켜 드릴 수 있을 거다.
괜히 분위기 가라앉는 얘길 한 것 같아서 가족 밴드에 딸의 졸업식 사진을 올렸다. 여행 중인 누나가 졸업 선물이라며 카카오톡으로 축하한다며 메시지와 용돈을 보내왔다. 즐거운 가족 여행 중일 텐데 괜히 걱정할까 봐 고맙다고만 했다.
설날 당일 바삐 움직여야 해서 딸과 일찍 일어나기로 했다. 7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금방금방 준비하는 딸이라 걱정하진 않았다. 아침에 일어난 딸은 엄마가 시킨 대로 세수하고 화장품을 꼼꼼히 발랐다. 덕분에 20분 정도 늦게 출발했다. 도착하면 바로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았지만 딸의 의사도 중요했다.
"할머니 집 가면 바로 밥 먹을 건데, 배고파?"
"응"
단호한 대답.
"으이구, 알았어"라고 말하고 집 앞 맥도널드에서 맥모닝 세트 하나를 안겨줬다. 아침부터 탄산을 먹이고 싶지는 않아서 집에서 물도 챙겼다. 크로켓을 잘라 반씩 나눠 먹었다. 딸은 맥모닝을 맛있게 먹었다.
"어떻게.. 입에 맞으세요?"
"응! 맛있어"
"이럴 때는 아빠 것도 챙겨주고 그러는 거야. 아빠는 운전하잖아"
"어? 그런 거야? 알았어"
자기 것만 샀다고 생각했는 모양이다. 딸아, 아빠도 배가 고프단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딸에게 전화가 온다. 사촌 언니의 전화였다. 부모님 집 앞 신호등이라 금방 도착한다고 얘기해 주라고 했다. 주차를 하고 선물을 들고 집으로 올라갔다. 아이 하나 어른 하나 없이 둘러앉은 밥상에는 허전함이 있었지만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었다. 형과 형수는 조카의 재수 준비 때문에 분위기가 다운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설이 되어 버렸다. 머쓱해서 할머니 집에 따라오지 못한 조카 때문에라도 형과 형수는 일찍 집을 나섰다. 우리도 점심을 먹고 나서 바로 나섰다. 부모님이 괜히 서운해할까 마음이 쓰인다.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께서 주머니에 봉투 하나를 넣는다. 며느리 생일인데 맛있는 거 사 먹으라 하신다. 의사 형제들 사이에서 늘 아린 막내였는데 오늘은 그 마음이 좀 더 짠하다.
설날 다음 날 처가에 간다. 처가엔 점심쯤 도착해서 저녁까지 먹고 오는 편이다. 그래서 느지막이 출발했다. 같은 동네라서 좋다.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아내의 부탁에 처가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공수할 예정이었다. 아들 간병하느라 고생하는 아내의 부탁은 뭐든 들어줘야지. 캔으로 밀봉해 주는 커피숍에서 커피 6잔과 마카롱 한 세트를 사서 준비해 간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나 커피 사고 있어서 조금 늦어'라고 처제에게 톡을 보냈다.
딸과 마주 앉아 게임을 하며 커피를 기다렸다. 딸에게는 마카롱 하나도 사줬다. 사장님은 많이 사면 꼭 마카롱을 서비스로 주셨다. 서비스받은 마카롱은 조카에게 줬다. 사실 나도 하나 먹고 싶었지만 이미 아이스박스 속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처제들은 모두 아들이 아픈 걸 알고 있었지만 장모님께는 장염이라고 얘기하기로 했다. 뭐라도 챙겨주시려는 장모님을 처제가 말린다.
"나도 장염 걸렸을 때 아무것도 못 먹게 하더라고"
나도 옆에서 거든다.
"집에 사람이 없어서 냉장고가 가득 차서 더 넣을 때가 없어요. 나중에 가져갈게요"
결국 직접 만드신 식혜만 받아왔다. 우리 집 식구는 모두 장모님께서 만든 식혜를 좋아한다. 아들은 특히 더 좋아한다. 식혜를 보니 또 마음이 짠하다. 퇴원하기 전에 딸이랑 다 먹어 버려야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의 주문이 있어서 집을 들렀다. <내일은 실험왕> 1, 2 권이 할머니 집에 있을 거라며 가져와 달라는 것이었다. 추가로 집에 들러 색연필과 종이를 챙겨달란다. 나오는 길에는 다이소에 들러 경장식을 섞을 물병 하나와 약을 담을 수납 케이스도 샀다.
병동에서 걸어 나오는 아내는 힘이 없어 보였다. 오늘도 아들과 심리적 소모전을 했을 거다.
"몸살 기운이 있나 봐"
그런 아내에게 아이스 박스를 열어 보였다.
"커피야~ 달달한 거 먹으면 나아질 거야"
아인슈페너 하나를 가져가 마셔보겠다고 한다. 하나 따서 빨대로 마시고 나니 기운을 조금 차린다.
"몸살이 아니라 당이 부족했던 모양이네"
"자기 잘 먹어야지, 나머지도 다 먹어. 배고프면 연락하고"
그래도 커피를 먹고 괜찮아진 모양이다. 아들은 맛없는 경장식을 먹지 못해(연휴에 바닐라 맛이 품절 됐다) 굶다시피 해서 기운이 없는 듯했다. 그런 아들과 시름하는 아내도 기운이 없다. 내일은 비빔밥이라도 만들어 와야겠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질 않아 마음이 편지 않다.
잘 해낼 수 있겠지. 장기 전이니까 잘 견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