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해내면 되는 거야
부서를 옮겨 일했지만 나에게는 잦은 지원 요청이 온다. 이유는 뻔하다.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회사에는 그런 일을 경험 사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남기지 않으면서 기술을 남기겠다고 용쓰고 있는 게 무슨 모순인지 한심하기만 하다.
나의 업무를 정확하게 말하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고 해야 할까. 메카트로닉스 쪽에서 제어를 담당하고 있다. 늘 C++ 만 사용했었는데 언제부턴가 C#도 하고 PLC도 하고 있다. 만능이 되어가는 건지 그냥 굴려먹기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낙서장을 갈겨놓은 듯한 코드를 보니 욱한다. 이런 걸 한 달 만에 해내라고? 속은 깊은 분노를 느낀다.
"와, 이제 이것도 하는 거야?"
지나가던 다른 팀장이 농담을 던진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네요. 할 사람이 없다고..."
"완전 소방수네 소방수. 능력이 되니까 소방수 하는 거지"
"네에네에, 그 능력 없고 싶네요."
처음 보는 것에 잘하고 못하고 가 어딧단 말인가. 회사 구석에 골동품처럼 박혀 있던 것을 꺼내서 여기저기 고쳐놨다. 고객은 첨단을 요구하는데 이런 구식으로 데모를 하겠다니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뇌구조를 뜯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남아 있는 코드를 살펴보고 그냥 쓰는 건 포기한다. 여러 곳을 수정해야 한다. 그래도 코딩이 좋은 건 어디가 틀렸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니까 좋다. 어느 곳의 회사와는 완전 딴 판으로 명확하다. 그렇게 나는 에러들과 놀고 있었다.
"부장님 뭐 하세요?"
"나? 얘랑 친해지는 중인데?"
옆에서 보면 꽤나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겠구나 싶었다. 하긴 노는 건 아니니까. 뭘 알아야 시작을 하지. 수많은 에러와 마주하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다. 충분히 친해지고 나서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완벽하게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이거 보며 일해"
부사수가 처음 생겼을 때 나는 두툼한 책 한 권을 주며 말했다. 내가 본 책들 중에 좋았던 책들만 가져다줬다. 없는 책은 회사에 신청해서 사 줬다. 바이블 두께에 기겁한 듯 얼굴색이 좋지 않다.
"쉬엄쉬엄 봐도 돼. 필요한 게 어딨는지만 알면 되니까"
일을 시키는 것과 익히는 건 분명 다르다. 모든 지식은 배우고자 하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쳐 줄 수 없다. 배움이라는 배우는 사람에게 절반 이상의 책임이 있다. 그래도 가르쳐야 시킬 수 있으니 책도 주고 시간 내어 설명도 한다. 회사는 돈을 주고 다니는 곳이 아닌 돈을 받고 다니는 곳이다. 그래서 빨리 자신의 존재를 내보여야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녀석은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것 같다.
"아직도 모르겠어?"
"이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걸 아직도 모르면 어쩌니..."
여전히 책 초입에서 헤맨다. 분명 몇 번이나 설명했었는데. 답답하다. 이 정도면 이해력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더 설명하기엔 내 일도 있었기에 더 얇은 책을 건네며 말했다.
"이건 좀 더 쉬워"
유튜브가 있었으면 가르치기 더 쉬웠을까? 배울 의지가 없는 사람은 신이 와도 어쩔 수 없을 거다. 가르치는 사람의 의지마저 꺾이면 고립된다. '이 정도면 적성이 맞지 않은 거겠지'라고 나도 내려놓는다.
"부장님이 분명 그랬다니까요."
"내가요?"
"그렇다니까"
"에이, 설마요"
평소에도 술을 즐기지 않아서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술을 마시진 않는다. 평소에 장난이 심한 동료의 말이라 더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 속 마음이 나왔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생각보다 많이 마셨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할 거면 집에 가'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혼자 부정해 본다. 몇 달 뒤 그 친구는 이직을 했다. 그리고 더 좋은 곳으로 갔다. 이번에는 적성에 맞는 듯했다. 적어도 코딩은 하지 않는 일이니까. 붙임성 좋은 성격이라 맞는 일을 잘 찾은 것 같다.
요즘처럼 뭔가를 배우기 쉬웠던 적이 있나 싶다. 앞으로도 점점 더 좋아지겠지만 인터넷에는 많은 정보가 널려 있고 유튜브만 봐도 강의로 가득 차 있다. 여차하면 클래스팅 신청을 하면 된다. 그럼에도 뭘 배워야 할지 모르겠다면 책을 보는 것이 가장 쉽다. 익힌다는 마음가짐은 내려두고 그저 알아간다는 생각으로 책을 편다. 그저 친해지는 거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많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도 능력이다. 내가 쓸 도구가 할 수 있는 걸 아는 것도 중요하다. 도구가 여러 개라면 서로의 장단점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두루 알아야 한다. 디테일은 검색으로 채우면 된다(시험 보는 것도 아니고). know-how에서 know-where의 시대니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수학자는 주인공에 π(파이)를 구해 보라고 했다. 주인공은 왜 해야 하냐고 물었고 수학자는 '친해지는 방법'이라고 답했다.
좋아하지 않는 걸 하는 건 고욕이다. 좋아하려면 친해져야 한다. 친해지려면 자주 봐야 하고. 물론 끝까지 친해지지 않는 녀석들도 있다. 그럴 땐 미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친해지는 건 꽤나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고 마주하기를 꺼리면 안 된다. 오래 볼수록 자세히 볼수록 예쁘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겹다. 시간은 거짓되지 않다.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을까? 만나다 헤어질 수도 있지만 친해지고 싶다면 욕심을 버리고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그렇게 싹트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