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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곰씨 오만가치 Jul 12. 2024

노련한 을이 되어 간다.

갑이든 을이든 역량이 힘이다.

 "그렇게 잘났어요?"


  예전엔 자신의 일에 프라이드를 가진 고객 담당자를 자주 만났다. 그들은 아는 것도 많았고 열정도 넘쳤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이 강했다. 내 담당자도 그런 사람이었다.


 "프로그램 좀 한다고 이게 쉬워 보였어요? 이거 불량 나면 얼만 줄 알아요? 한달 월급 정도 된다구요."


  급한 나머지 내가 몇 가지를 조정했다. 내가 만든 장비 세팅 값을 내가 만졌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나도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것이지만 고객 담당자는 자기가 테스트를 진행 중이니 자신 말곤 아무것도 만지면 안된다는 얘기였다. 죄송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가 해달라는 것만 해주세요. 나머진 제가 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다. 자기 일도 다 떠넘기는 사람이 부지기수고 자신의 일인데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다. 나도 이 담당자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공부해 오겠다며 회의를 다음으로 미루는 담당자는 내가 본 담당자 중에서도 여러 면에서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기 일은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세팅할거에요?"


  그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실 몰랐다. 처음 만든 장비고 그걸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프로그램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알아야 했다. 갑작스런 질문에 멀뚱멀뚱 하고 있으니 그가 한 숨을 길게 내쉰다. 하나 하나 알려 준다. 나는 그렇게 고객에게 배우기도 했다.


 "아니, 이런 것도 생각 안해보고 만들어요?"


  만드는 거야 비슷하게 만들지만 (게다가 난 프로그램 하는 사람이고!) 디테일한 것까지 생각할 순 없었다. 문제가 닥쳐야 알 수 있는 신생 업체와 이미 문제를 수 없이 겪은 기존 업체와의 차이이기도 하다. 담당자는 그 동안 일본 장비를 운영하며 생긴 노하우로 무장하고 있었다. 똑같은 고생을 또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답답했던 모양이다. 


  일본 장비의 꼼꼼함을 따라가는 건 쉬운게 아니다. 국산화 열풍이 있었지만 '싸게'가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여러모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우호적이지 않더라도 결국 해내야 했다. 고객도 자신의 일이 되면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다. 밤을 세워가며 그렇게 동고동락 하게 됐다.


  띠리리리..


  새벽. 전화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울린다.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이다. 현장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바로 연락이 온다. 시간은 곧 돈인 곳이다. 엔지니어의 수면을 지켜 줄 만큼 여유로운 곳이 아니다. 그렇게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문제가 생기면 가야 한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새벽에 넓은 공장을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공용 자전거를 찾아 페달을 밟는다.



 "지금 어디에요?"

 "집인데요"

 "장비가 뻗었는데 뭐해요. 빨리 튀어와요"

 "뭐라고요?"


  예의 없는 고객이 있다. 말에 싸가지가 없다.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몇 번의 전화가 더 왔지만 받지 않았다. 못된 것 배워 소리 지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나도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에게 월급 주는 것도 아니다. 매일 고됨의 연속이어서 주말 아침 늦잠을 깨워 넣고도 말이 험하다.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희한한 놈이야"


  나는 고객 공장과 꽤 멀리 살게 되어서 도착하려면 한 시간 이상 걸린다. 어차피 멀어 시간 계산도 되지 않는다. 일 이십분 늦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발 좀 동동 구르라고 느릿느릿 움직인다.


 "주말이면 미안한 티라도 좀 내던가"


  옆에 있던 아내도 말을 거든다. 괘씸한 마음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담당자들에 대한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게 만든다. 정속, 안전 운전을 핑계 삼아 천천히 고객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차에서 한숨 내쉬곤 짐을 챙겨 발을 뗀다.


 "왔어?" 팀장이 먼저 와 있었다. 문제 생겼다고 여기 저기 많이도 들쑤신 모양이다.

 "잘 돌아가고 있네요?"

 "어.. 간단한 거. 멀리서 온다고 고생했다. 조금만 더 보고 나가서 밥이나 먹자"


  문제가 생기면 생산팀에서 민감해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성과이기 때문이다. 생산팀과 잘 지내는 건 중요하다. 계획에 없던 교육도 해주는 것도 문제가 생겼을 때 빠르게 조치가 되면 서로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의 유대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렇게 십 수년을 같은 일을 해 왔다. 세월이 흘러 그런지 담당자들 분위기도 다르다. 좋게 변했다는 게 아니다. 일에 자부심 있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들만 현장에 있다. 업무는 이제 '을'이 주도한다. 사전수전 다 겪은 '을'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갑'은 위협이 되질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대신에서 '을'들은 일정을 챙긴다. 우리는 늘 해오던대로 하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신입은 그냥 두리번두리번 거릴 뿐이다. 시간을 끌면 서로 피곤하기 때문에 신입을 재촉한다. 그러다 보면 배테랑이 되겠지.


 "아이고, 오늘은 아무것도 못하겠네"


  신입 들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늘 현장에서 만나는 옆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 해가며 일을 진행한다. 신입이 챙기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다 해놓는다. 신입은 일이 원래 이렇게 쉽게 진행되는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진행했다는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애송이는 우리 회사에서도 늘어간다. 가르칠 새 없이 바쁘게 일이 닥친다. 납품 일정도 빡빡해져서 도저히 맡겨두고 지켜볼 시간이 없다. 게다가 애송이들은 핸드폰 쳐다보기 바쁘다. 신입일 때야 일 못하는 것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몇 년이 지난 뒤엔 능력 없는 사람이 될텐데 걱정이다.


  갑이 잘 해주면 호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는 을이 따라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소리 치는 갑의 요구는 최대한 피한다. 무슨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안되게 만든다. 대신 친절한 갑에게는 어떻게든 해주려 한다. 사람을 남긴다는 말은 시간이 갈수록 깨닫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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