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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Aug 23. 2022

마도로스 김

폭풍처럼 살다 간 한 남자의 일생

“콱! 마, 밟으소!”

 

장남은 작두에 목을 넣었다. 쇠죽용 볏짚을 자르는 작두의 발판을 밟으면 아들의 목은 끊어지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었다.


아내에게 매질을 하던 아버지는 얼어붙고 말았다.  모질게 때리던 몽둥이를 든 체, 목숨을 걸고 발악하는 아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영남의 어느 마을은 경주 김 씨 집성촌으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낙동강 언저리 천수답과  범람지에서 겨우 농사를 지어먹고사는 촌 동네였다. 키가 크고 잘 생겼다는 그 아들의  할아버지는 그 당시 쌀 중개인으로 돈을 꽤 벌어 그 마을 주변에서는 제법 큰소리치고 살았다고 하였다.


그 마을에도 500년 조선의 목을 조여온 유교법도에서 좋은 것은 다 사라지고 나쁜 것만 남아 민초를 괴롭히고 있었다. 부자유친은 맹목적인 조상숭배와 무제한 보장된 어른의 방종으로 이어지고 장유유서는 장자로만 재산과 권력이 집중되어 기득권의 교만이 되었고 부부유별은 여자는 남자에 귀속되어 출산과 육아, 농사일에 내몰리고 최소한의 인권마저도 내팽개치진 남녀차별의 극치였다.

 

한 집안의 장자로 태어난 장남은 그렇게 모든 기대와 지원을 받아 그 당시 서울의 고려대학 법학과에 진학하기도 하였다.  6.25를 군 기피자로 낙인찍혀 낙향한 그는 장자로서 집안을 일으키려는 책임감보다는 기득권의 단 맛을 즐기는 데만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 가족을 가장 힘들게 하였던 것은 젊은 가장의 여성 편력이었다. 몇 명 정도의 첩을 거느려야지 ‘능력남’이라는 칭호를 받던 시대였는지라 가는 곳마다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일본을 왔다 가며 검은 양복에 흰 가죽구두를 신고 담배 파이프를 문 그에게 '마도로스 김'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본처인 친모 사이에서는 아들 넷을 두었고 둘째 부인에게서 아들 하나, 딸 하나, 셋째 부인에게서 아들 하나, 그리고 자식이 없는 넷째 부인. 그야말로 밖에서 낳은 자식을 호적에 올려 본가로 데려와 키울 정도였으니 큰 집의 가족 간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날도 본부인의 원성을 듣다 못한 아버지가 조강지처를 패대기치며 핏대를 올리고 있는 그 징글징글한 모습을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머리가 클 데로 다 큰 장남이 보고 있다가 드디어 맞받은 것이었다. 안방에는 친 어머니와 작은 방에는 소위 첩과 벽을 사이에 두고 외줄 타기를 하던 마도로스 김에게 그날, 사달이 나도 큰 사달이 났던 것이다.


첫 부인은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로 부모와 부모끼리 혼사를 정하였고 소학교도 다니지 못한 첫 부인은 한글을 깨치지도 못하여 말없이 비밀에 싸인 여인처럼 보였다. 신문화가 범람하던 시절, 그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멋진 사내에게 목숨을 다해 남편으로 사랑하였지마는 애당초 남편은 무지한 아내를 싫어하였다.


지방 소도시의 한 여관에서 일을 하던 여인과 눈이 맞아 살림을 차렸다. 거기서 아들 하나와 딸이 태어나 본가의 호적에 올리고 겁도 없이 둘째 부인을 집으로 데려와 건넌방에 기거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안방과 건넌방을 오가며 공평하게 두 아내를 대한다고는 하나, 벽을 사이에 둔 두 여인의 질투는 전쟁보다 더 치열하였다. 남편이 안방에서 자는 날이면 둘째 부인은 밤새도록 방문을 들락날락거리고 깊은 밤중에 이불을 턴다고 시도 때도 없이 툭탁거렸다.


아들만 내리 4형제를 낳은 첫 부인은 나름 조강지처로서 역할을 다하고 첩에 대하여도 후덕하게 해 주려고 노력하였으나 둘째를 편애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둘 사이에 싸움이 나면 요사스러운 둘째 부인은 빠져나가고 첫 부인에게만 유독 매를 드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봐 온 큰 아들은 드디어 광속에 있던 작두를 들고 나와 시퍼런 작두날에 목을 집어넣고 발악을 하였다.


" 죽여 주이소! 마 죽고 말겠심더! "


 아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사건 이후로 둘째 부인은 이사를 갔다.  마을에서 50리 정도 떨어져 있는 김천 근처에 살림을 따로 차리고 제사 때에만 잠시 도둑고양이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장손에 장손으로 이어진 집안이라 1년 중 기제와 시제를 합쳐 근 20회의 제사가 있었고 본부인은 군말 없이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들었다. 제사가 있어야 볼 수 있는 남편의 얼굴이어서 제사 준비가 힘들기도 하였지만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보아야 옳다.


본처와 자식에게 미안한 심정을 감추려는 듯, 올 때마다 아이들 먹을거리와 빳빳한 1000원짜리 지폐를 아들과 조카들에게 뿌렸다. 덕분에 설날이면 아이들은 영광의 지폐를 받을 수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김천에 살던 둘째 부인은 자기가 낳은 아들을 개 패듯이 패는 남편에게, 보란 듯이 대들보에 목을 메어 자살하고 말았고 첩에서 난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없이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70세가 넘어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느 노파와 같이 살다가 노인이 병들고 돈도 떨어져 그 할머니는 떠나고 말았다.

 

인생은 덧없고 생명은 유한한지라 70세 말에 이르러 후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오갈 데 없어 본가로 들어와 밥만 축내다가 작은 부인과 함께 하였던 작은 방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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