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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목수 Sep 10. 2022

옥자

어린 시절의 옥자 누나 이야기


                          옥자



 나이 8살 무렵, 시골 마을 한 어귀에

서쪽 어디가 고향이라는 한 처자가

구름에 흩어지는 달빛처럼 흘러들어 왔지

 

보릿고개를 너머 너머 지리산을 배고파

넘어왔는데 동네에서 그나마 밥술이나 뜨는

우리 집에서 커다란 두 눈을 껌벅이며 식모살이를 시작했지

 

갑자기 없던 누나가 생겨

나긋나긋한 서쪽 사투리 말로

구슬치기에 눈알이 굴러다니던 나를

밥 먹으라 부르면

동네 청년들이 발정 난 수캐들처럼

훔쳐보곤 했지

 

소죽 쑤는 무쇠솥에 해거름마냥 지루한 물을 덥혀내어 목욕하는 옥자 누나의 살결은

달처럼 보얗게 빛이 났어

 

어느 여름날이었어

 

저녁 더위를 모깃불로 저어 내고

두어 번 얕고 깊은 잠이 지나갈 즈음

옥자 누나가 자는 방에 도둑이 들었어

 

도둑놈 잡아라!

아버지는 맨발로 그 밤에 5리나 쫓아갔지만

그 도둑은 젊은 다리로 10리를 도망갔지

 

다음날 마루에 찍힌 도둑놈의 발자국은

문신처럼 어지럽고도 선명하였지만

아버지의 표정에서 옥자 누나의 붉은 볼에서

그놈은 도둑이 아니라 사랑의 욕정에서

뛰쳐나온 불타는 젊은 영혼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

 

10년을 식모살이하다가 시집을 보내려

어찌어찌하다가 고향을 찾게 되고

좋은 신랑 만나 충청도 금산의 어느 마을에서

인삼농사를 하며 살았다지

 

지금은 나이 60이 넘었을 텐데

어디서 사나 몰라




보릿고개 넘던 시절, 배만 곪지 않으면 행복했던 시절, 사는 것이 무서운 시절이 있었다.


먹고, 입고, 자는 것만 해도 바쁜 시절, 길 잃은 영혼이 즐비하였다. 옥자 누나도 길을 잃었다.


친척도 아니고 아는 이 하나 없는 타향에서 외로움으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였다. 세월을 따라 구비 구비 흘러 처녀가 되고 사랑을 찾아갔다.


"밥 먹으러 오너 라이~"


대문 앞에 나와 외치던 옥자 누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잊고 살았던 컴컴한 슬픔이 들린다.


한때는 든든한 보호막이었고 포근 한 휴식처였던 옥자 누나의 소식은 끊어지고 행방이 알 길 없다. 친누나였으면 혈연의 질긴 끈으로 이어주고 있을 텐데...


아니, 옥자 누나 스스로 숨어버린지도 모른다. 길 잃은 인생의 흑역사를 기억하기 싫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름 없이 살아낸 인생의 한 페이지를 접어두고 새 삶을 살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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