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순’은 흔한 이름이 아니다. 요즘의 이름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어르신들의 이름자 중에서도 들어본 바 없다. ‘~자’자 돌림의 이름들과도 확연히 다르고, ‘간난이’ ‘언년이’ ‘막둥이’와 같은 유별난 이름도 아니다. 흔한 이름 끝 자인 ‘순’을 가졌음에도 잘 없는 이름이다. 글을 쓰는 와중에 이제야 그 이름의 근원을 추정할 수 있었다. 을유년생이었던 것이다. 1945년 12월생, 을유년에 태어난 그녀여서 ‘을순이’가 되었으리라는 추측은 가히 합리적이며 왜 그것을 이제야 알았나 기막힐 따름이다. 갑순이, 병순이, 정순이, 무-기-경-신-임-계순이가 될 수도 있었던 그녀. ‘이왕이면 을보다는 갑이 나으련만 왜 갑순이가 아니고 을순이람’ 그리 생각해본 적은 있었던 것 같다.
자식 앞에서는 언제나 을이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디서라도 갑이 될 수 있는 그녀, 을유년생 이을순.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을숙’. 그녀는 ‘을숙’으로 불리길 바라고 실제로 꽤 오래 ‘을숙’으로 살아왔다. 지어질 때 본래 ‘을숙’이었는데 어느 순간 ‘을순’으로 둔갑해 버린 일은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벌어졌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자 ‘숙’은 동사무소 직원의 손끝에서 ‘순’으로 변해버렸고, 그녀는 그것이 내내 억울하다. 법적으로는 ‘을순’이 된 지 오래이나 가족, 친척, 친구들로부터 ‘을숙’으로 불리며 ‘을숙’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며느리 김보리나 손녀 송승윤은 그 차이를 잘 모르겠다. 숙이나 순이나, 순이나 숙이나. 근데 그게 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어딘가 공책 표지에 ‘이을숙순’이라고 굵게 적은 것을 보니 이름자를 향한 그녀의 갈등이 느껴진다. 을숙과 을순 사이를 방황하며 살아온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를 표현하기에는 ‘이을순’이 적합하다고 김보리와 송승윤은 합의한다. ‘을숙하다’, 보다는 ‘을순하다’가 어울리는 그녀는 을숙스럽지 않고 을순스럽다. 법적, 사회적 정체성을 가진 이름 ‘이을순’으로 그녀를 표기하고 그에 걸맞은 그녀의 삶을 조목조목 기록하는 것이 그녀에게 큰 불효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을숙님, 이을순이어도 그대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