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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로 Jan 03. 2016

《당신에게 몽골을》::열 번째 기록::

이름 없는 당신을 위하여

열 번째 기록 - 양고기 요리, 허르헉


   「어제도 못 봤어요?」 

   「네…….」 

   「원래 여기가 공기가 맑은 시골이라 별이 많이 보이는데…….」 

  오후 10시쯤 해만 떨어지면 마당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오늘 밤은 별이 뜰까, 내일은 별이 뜰까 기대하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나 보다. 어치르 씨는 애꿎은 비를 탓하며 나를 위로해줬다. 반짝이는 별과 아름다운 은하수로 가득 찬 밤하늘을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몽골에 온 이유도 고작 그런 것들 때문이었다.

  어치르 씨의 원래 일정은 한국에서 눈 치료를 받고 조금 늦게 귀국하는 것이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비행기를 일찍 타게 됐다고 했다. 이런 대단한 인연이 있나. 뭐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평생 보지 못했을 인연이었다니 다시 한 번 인연의 위대함을 느낀다. 여느 것도 내가 의도한 바가 없다. 결국 이 모든 일, 나의 생(生)은 나의 의도로 굴러가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느낀다.

  또 다른 가족이 와서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었다. 두 가족은 홉스골 호수에 들렀다가 할머니 네에 왔다고 했다. 이로써 온가족이 다 모였다(집주인 내외는 휴가철이라 한국으로 여행 감). 진짜 대가족이었다. 칭군에 조카들만 10여 명이다. 안 그래도 몽골어 발음하기가 힘든데, 이름 외우다가 볼장 다 볼 것 같았다. 할머니께서는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버르따(14살, 칭군에의 조카)와 은누(15살, 칭군에의 동생)는 차를 몰고 할머니의 심부름을 하러 나갔다. 후리셰(5살, 칭군에의 조카)라는 막내는 나를 곧잘 따라다녔다. 종이비행기를 접어 시합도 했는데 남자아이라서 그런지 정말 좋아했다. 

  차고로 나갔는데 못 보던 아이가 있었다. 양 한 마리가 묶여 있었는데 양의 눈을 보고는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눈동자가 구슬퍼 보였고 혼자 있는 신세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저를 묶고 있는 끈이 답답해 보였다. 양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후리셰가 금방 따라 나와 내게 업혔다. 둥개둥개 하면서 마당을 거닐었다. 그러다가 안아 달래서 앞으로 안겼는데 후리셰가 뽀뽀세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짝 당황했지만 정말 좋았다. 평소에 무자비한 뽀뽀세례를 받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더 생소했다. 막 예쁨 받는 느낌이었는데 되게 오래전에 그런 걸 받았던 것 같았다. 정겨웠다. 후리셰의 어머니는 내가 저와 놀아줘서 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몽골의 여름은 낮이 너무 길기 때문에 틈틈이 낮잠을 자야 한다. 게다가 한국보다 지대가 높아서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나는 후리셰를 뒤로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이 나무집의 기운이 참 좋은 것 같다. 아늑해서 잠도 잘 온다. 눈을 떴는데 아직도 밖이 훤했다. 당최 여기서는 지금이 몇 시인지 가늠이 안된다. 사실 시계 따위도 내팽개친 지 오래다. 내게는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 해가 뜨면 날이 밝은 것이고, 해가 지면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참신한 하루들이다. 매일이 새롭다.

  어치르 씨는 나에게 집 생각이 많이 나지 않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지 않다 말했다. 며칠 되지는 않지만 그냥 이 집이 내 집만 같다. 내게 손 뻗는 사마가, 밤새 나를 그리워했다는 후리셰가, 나 추운걸 걱정하는 버르따가 더 친근하다. 한국에서 외할머니 집에 가면 눈치보기 바쁘다. 삼촌도, 할머니도, 엄마도 내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탓이었다. 한 마디씩만 거들어도 벌써 서너 마디다. 나는 그게 제일 부담스럽다. 그래서 난 여기가 좋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시고 챙겨주시는 게 그냥 좋다.

  오늘 저녁 메뉴는 허르헉(Horhog)이었다. 몽골의 유목민들이 아주 귀한 손님이 왔을 때나 명절 때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주재료는 양과 염소이고, 달궈진 돌을 손질해둔 양과 염소 체내에 넣어서 요리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는 식탁 앞에 앉았는데 나는 멍-해졌다. ‘그니까 이 요리가 그 친구…….’ 나는 가슴이 아려왔다. 

  할머니께서는 손으로 고기를 발라주셨다. 양을 죽이는 모습을 여자가 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걸 보면 ‘두려움’을 알게 돼서 훗날 출산을 하게 될 때 그 두려움이 떠올라서 좋지 않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 어디에서도 알 수 없었던, 오직 몽골의 이야기다. 

  별이 뜨지 않으면 어떠하리, 가족들과 하하호호 떠든다고 정신이 없다. 후리셰 어머니는 영어 선생님이어서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녀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후리셰의 둘째 형이 연주하는 마두금(몽골 전통 악기, 馬頭琴)의 소리와 함께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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