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정오가 좀 넘어서 20년 지기 베프 지영에게서 사진 메시지가 왔다. '웬 사진이야?' 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세상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야! 이거 뭐고?"
"헤헤헤 놀랐나?"
"야야야! 이게 뭐고? 진짜가! 니 임신했나? 뭔데? 니 계획한 거가? 뭔데!! 이게 뭔 일이고??"
"헤헤헤 응 임신 맞데. 지금 병원이야."
"악~~~~! 진짜가! 악~~~ 악~~ 야!! 진짜 축하한다. 진짜 축하한다. 우야노. 진짜 축하한다. 어흑 어흑 엉엉엉~~~~~~"
"뭐고. 왜 울고 그라노. 엉엉엉~~~"
점심때가 되어 김치찌개에 적신 밥숟가락을 들다 말고 그렇게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엉엉 대성통곡을 해버렸다. 반대편에서 내 친구 지영이도 병원 어느 한 구석에서 그렇게 엉엉 목놓아 울고 있었다. 한참을 울었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고 울다가 중간중간 '어흑 축하해. 진짜 축하해.'라는 말만 겨우 뱉어낼 뿐이었다.
18년 전 어느 밤에도 우리는 오늘과 꼭 같이 전화기를 마주하고 말없이 엉엉 울기만 했다. 고1 짝꿍으로 처음 만나 3년 내내 같은 반으로 지내면서 대학교도 꼭 같이 서울로 가자고 약속했던 우리는 둘 다 상경에 성공했고 신나는 스무 살을 보내고 여름방학 때 고향에 내려갔다.
지영이 아버지는 우리 고향에서 유일한 대기업에 다니셨기에 지영이 집안 사정은 한결같이 안정적인 형편이었던 것에 반해 우리 부모님은 늘 이 장사 저 장사를 하시다가 급기야 파산하셨다. 서울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첫여름방학에 고향에 내려가 보니 우리 가족은 외할머님 댁 안채에 얹혀살고 있었다. 반복되는 창업과 폐업으로 인테리어 비용과 권리금이 고스란히 빚으로 쌓여갔고 파산에까지 이르게 된 우리 부모님.
학자금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해결했고 서울로 돌아와 1학년 2학기 때 부터 생활비와 방세를 벌기 위해 방과 후 아르바이트가 시작되었다. 천성이 씩씩한 성격 덕에 엄마가 물어도, 친구들이 물어도 재미있다고 힘들지 않다고 웃으며 대처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새내기 친구들이 다 가는 MT도 못 가게 되고 축제도 못 가게 되니 마음속에 서러움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하도 괜찮은 척을 해서 나 자신까지도 존재를 몰랐던 서러움이 폭발한 어느 밤. 같은 과 선배 룸메 언니에게는 자존심이 상해 그 서러움을 들킬 수가 없었다. 밤 늦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 앞 건물 계단에 앉아 내 친구 지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응, 내다."
"응, 어디고? 늦게 웬일이고"
"흐헙... 엉엉엉~~~"
"니 많이 힘들구나........엉엉엉......"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둘이 울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는지 이 밤에 전화해서 갑자기 왜 우는지 묻지도 않고 친구는 그저 같이 엉엉 울어주었다.
한참을 울고나서 나는
"괘안타. 이제 집에 들어갈게. 자라."
"응. 그래. 쉬어라."
나와는 다른 형편이었지만 내 친구는 온 마음을 다해 내 스무 살의 힘겨움을 같이 나누어주었다. 나의 지친 마음 반쪽을 친구가 덜어간 이 전화 통화 덕에 나는 스무 살 그 시간을 잘 버텨내었다.
그런 우리가 18년이 지나서 또 전화통을 붙들고 이러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한 20대를 보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우리는 그동안 타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켜가며 살았다. 하지만 마흔을 앞두고 엄마가 된다며,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친구가 보내온 초음파 사진은 단숨에 우리들의 마음을 스무 살의 그때처럼 말랑이게 만들었다.
쿨한 척하며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딩크 예찬 드립을 친구에게 늘어놓으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엄마가 되어 겪은 경험들과 세세한 감정들을 나의 단짝 친구와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우리 딸의 동영상 조회수가 100이 넘도록 반복해서 돌려보는 친구 부부를 보면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몰려와 휴대폰을 아예 내려놓고 대성통곡을 했지만 이번에는 밝은 대낮이었다. 컴컴한 한 밤 중에 서러움과 불안에 젖어 힘겨움을 토해내던 18년 전 그 밤과는 달랐다.
"나 이제 회사 들어가 봐야 돼. 점심시간에 병원 온 거야. 그만 울어."
"응, 빨리 드가라."
"응, 정말 나만큼 똑같이 기뻐해 줘서 고맙다. 니 이렇게 미친 듯이 우는 거 보니까 내가 인생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맙다."
"빨리 드가라. 항상 몸조심하고."
"응."
엉엉 울기만 했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모르고 전화를 끊었던 18년 전과는 달리, 친구는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야무지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경상도 상여자들이라 그런 표현을 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기에 친구의 말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육아는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이라고 우스갯소리로 친구를 겁주고 놀리기도 하지만, 친구 부부가 아이에게 얼마나 잘하고 얼마나 좋은 부모가 될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걱정이 없다. 워낙 깔끔한 성격에 감정적으로도 섬세한 민이오빠는 내 친구보다 더 든든하다. 오빠는 육아 도사가 될 것 같다. 딸이든 아들이든 아이에게 친구처럼 다정하고 섬세한 아빠가 될 것이 눈에 그려져 한 인간으로서 그런 아빠를 가질 그 집 자식이 벌써 부러울 정도다. 잉태의 순간부터 메마른 이 이모의 눈물샘을 자극할 정도의 행복을 불러온 이 귀한 아기가 태어나면 얼마큼 더 큰 행복을 가져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나의 일처럼 기쁘다는 말. 남일 같지 않다는 말.
마흔이 다 되어 오늘 뼈저리게 실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