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취업한 호주인 남편이 당뇨 판정을 받았다. 직장인 건강검진을 받았더니 고혈압에 당뇨가 심각한 상태로 밝혀져서 벌써 7년 넘게 약을 먹고 있다. 남편의 외가 쪽 어른들이 당뇨병이 있으셨기에 병원에서는 남편도 아마 훨씬 이전에 발병이 되었을 거라고 했다. 호주는 국가 건강검진도 없고 자영업자였던 남편이 일부러 건강검진을 받지는 않았기에 전혀 모르고 있다가 7년 전에 한국에 와서야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당뇨병에 대해서 무지했던 나는 '명의', '엄지의 제왕' 등등 온갖 당뇨병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병에 대해서 공부했다. 그리고 당뇨병에 좋다는 여주를 달인 물을 끓이고 채소 위주 식단을 짜고 쌀눈이 살아있는 쌀눈쌀로 식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먼저 잠자리에 들면 새벽에 혼자 영화를 보다가 떠먹는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먹거나 코스트코에서 파는 대형 초콜릿 한 블록을 다 먹곤 했다. 다음날 쓰레기 봉지에 버려진 포장지들을 보고 남편을 다그치면 남편에게 내 말은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되고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남편이 정말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기는 언제까지 당뇨약을 먹어야 되냐고 물었다. 나는 어이를 상실한 채로 당신이 정말 관리를 잘해서 운이 좋으면 죽기 전까지 약만 먹을 수 있을 것이고, 지금처럼 관리를 잘 안 하면 약이 아니라 매일 배에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아야 될 것이고, 그래도 관리가 안되면 손가락, 발가락이 문드러질 것이라고 설명해주며 당신 병에 대해서 인지를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또 부부싸움이 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 억울했다. 남편의 식단 조절을 위해 요리에 신경을 써봤자 남편이 콜라 한 잔을 마시면 나의 노력은 다 수포로 돌아가고, 병에 대한 남편의 무지를 깨우쳐주려고 설명을 하면 할수록 나는 잔소리꾼 악처가 되어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짜증 나는 포인트는 남편이 무얼 먹을 때마다 내 눈치를 본다거나, 병원에 가는 날이면 가기 싫어하는 남편을 내가 억지로 질질 끌고 병원에 가는 식이니 남편과 나의 관계가 부부가 아닌 아들과 엄마와 같은 관계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남편의 당뇨병 관리에 관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병원에서 약을 타 온 어느 날, 자신이 피해야 될 음식 리스트를 보고 도대체 뭘 먹고살아야 되냐고 투덜대는 남편을 보고 진지하게 물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밤마다 아이스크림 한 통씩 먹고 60살에 죽을래 아니면 관리하고 장수할래?
남편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60살에 죽겠다고 했다. 그래서 알겠다고 당신 뜻이 그러하다면 나는 이제 당신의 병에 대해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난주 금요일 남편의 당뇨약이 다 떨어진 걸 보았다. 금요일마다 쉬는 남편이 그 날 병원에 다녀오지 않으면 그다음 주 금요일까지 일주일 간 약을 거르게 된다. 남편에게 첫 아이를 픽업 가기 전에 시간이 있으니 같이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남편이 인상을 썼다. 피곤해서 가기 싫다고 했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오늘 남편이 오후 출근이라 병원에 갈 거면 같이 가주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간다고 했다. 이사를 한 탓에 이번에 2번째로 뵙는 의사 선생님이 당활색소 수치 검사 결과를 보시고는 경악하셨다. 최고 수치 10 중에 6 이하가 나와야 정상인데 남편의 수치는 9.8이었다.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이 정도 수준은 약으로 조절이 전혀 안 되는 상태라며 주사를 맞는 치료로 넘어가야 된다고 하셨다. 한국말을 못 하는 남편이기에 의사 선생님은 나를 향해 언성을 높이셨다. (이전 병원 의사 선생님도 마찬가지 셨었다.) 식단 조절과 운동을 강조하시며 아내의 역할을 강조하시려는 찰나에 내가 의사 선생님의 말을 끊었다.
"선생님, 제가 통역은 해드리지만 환자 본인이 의지가 없으면 관리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죠. 자꾸 말씀하시면 부부싸움이 되고 그렇죠?"
"네, 잘 아시겠지만... 그렇죠. 선생님, 그래서 저는 관여 안 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은 없는데... 일단 약을 먹는 마지막 달이라고 생각하시고, 이번 한 달 경과를 지켜보고 주사 치료로 넘어갈지 정할 테니까 이번 한 달 신경 써서 관리하시는 걸로 전해주세요."
"네, 잘 전달하겠습니다."
유난히 배를 만지는 것에 예민해서 손에 배만 갖다 대도 뒤로 펄쩍 물러나는 남편은 다음 달부터 주사 치료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주사 치료로도 안되면 신장이나 다른 장기들의 기능이 무너져서 투석을 받아야 될 수도 있고 손가락, 발가락이 썩어 들어갈 것이라고 심지어 당뇨발, 당뇨 손 (diabetic feet and hands)이라는 말이 있다며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한번 해보라고, 디스커버리 채널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당신의 병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좀 보라고 다시 한번 일러주었다.
덧붙여, 나는 당신이 건강할 때 도와줄 의지가 있는데 당신이 거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후 신체적으로 당신이 무너진다면 나는 그때 돼서 무너진 당신을 거두어 줄 생각은 없다.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킬 것이고 가끔씩 인사는 가겠다고 다시 한번 나의 스탠스를 상기시켜주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휘핑크림 그득 올라간 프라푸치노 대신 시럽 없이 라테를 주문한 남편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동네 한 바퀴 뛰고 온다고 공원으로 나갔다.
부부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이유로 남편 스스로도 무지한 자신의 병에 대한 관리 책임을 떠맡을 필요는 없다. 남편은 내 아들도 아니고 보호가 필요한 미성년자도 아니다. 부부라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부부도 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