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메시지가 왔다. 국제결혼한 부부들이 가입되어있는 온라인 카페에서 알게 된 한국-미국 커플로 27개월 아들을 키우는 아기 엄마인 친구였다. 바로 옆 동네에 살아서 가끔 같이 밥을 먹는 사이인데 주말 저녁 늦게 연락을 한 걸 보니 그녀의 다급한 마음이 느껴졌다.
첫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이 친구의 남편도 우리 남편처럼 한국어를 전혀 못하기에 아이는 자연스레 이중언어를 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있다. 27개월인 아들이 아직 할 수 있는 말이 영어든 한국어든 단어 몇 개 정도라 요즘 이 엄마가 어딜 가든 한 소리 듣는 모양이다. 어린이집 교사들도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실 거면 한국말부터 집중해야 아이의 교우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해오고, 동네 아줌마들도 같은 개월 수에 천상유수로 말을 잘하는 자신의 아이들과 은근히 비교하며 이중언어 하는 아이라 말이 느릴거라고, 원래 아들이 말을 늦게 배운다면서 한 마디씩 염장질 같은 위로를 던질 테다.
주변 반응에 초연하려고 노력해도 순간순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고, 잘 견디다가도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이 올 땐 어디 검사라도 받으러 가야 되나 싶고, 문득 내가 너무 무심한 엄마인가, 아이를 방치하는 게 아닌가 죄책감을 가질 이 엄마를 생각하니 우리 첫째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우리 첫째도 유난히 말이 늦었다. 36개월이 지나서야 소위 '말문' 이 트였던 것 같다. 나는 호주에서 첫 아이를 낳고 6개월 때 한국에 들어왔기에 첫째가 14개월 때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아이는 영어에만 백 프로 노출되어 있었다. 지금은 나도 한국에 산지 오래 되었고 사회생활을 하니 집에서도 익숙하게 한국말을 쓰지만 그때만 해도 1년 동안 집에서 육아만 했고 연고 없는 도시에서 친구없이 남편과만 이야기를 나누니 평상시에 한국말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영어 밖에 몰랐던 딸이 14개월에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영어와 한글을 혼용해서 쓰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는 선에서 영단어 한글 단어를 총동원해서 문장을 만든 것 같다. "대디, 애플 없어!" "마미, 아이 해브 아야 히얼." "타요 싯다운 싶어.=I want to sit down on Tayo bus." 이런 식이었다. 친정 부모님과 비슷한 또래 아이를 키우는 동네 엄마들은 딸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어린이집에서 또래들과 소통하는데 문제가 생길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
하지만 어른들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이들은 자연스레 서로에게 적응해서 잘 생활하고 있었다. 딸과 같은 반 친구들은 우리 딸의 영향으로 헤어질 때는 "씨유!" 라고 인사하고 색깔도 반 전체가 보라를 "퍼플"로 쓰는 등 아이들만의 방식으로 서로서로 아는 언어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있었다.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말을 늦게 시작했지만 우리 딸의 한국어 발달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48개월이 지나 한국 나이 5세가 되자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아이의 아빠와 친가식구들은 한국말을 전혀 못하니 아이는 영어도 구사할 수 있어야 되는데 한국에서 살다보니 한국말만 압도적으로 잘하게 된 것이다. 어린이집에 등원하여 선생님과 또래들과 보내는 7-8시간의 위력이 대단했다. 아빠가 영어만 한다고 해도 아이가 하원 후 아빠와 이야기 하는 시간은 1시간도 되지않고, 아빠와의 접촉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환경에서 한국말만 하니 오히려 이제는 아이의 영어 발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정도로 아이의 한국어 발달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주변에서 본 다른 다문화 가정 자녀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우리 동네에 첫째 아들, 둘째 딸을 가진 한국-영국 부부 가정이 있는데 이 집 큰 아들이 한국 나이 5세 때까지도 어떤 언어로도 말을 거의 못 해서 눈에 띄는 어려움이 있었다. 유치원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혼자 구석에 떨어져 앉아있거나 친구들과도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평소 남의 아이 일에 간섭하는 것은 쓸데없는 오지랖 이라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아이가 상담이나 검사를 받아 보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조언을 해줬을 정도다. 그런데 그 아이가 6세 중반에 말문이 터지더니 처음 입 뗀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숨에 말을 쏟아내었고 한글 학습도 7세 때 무리없이 잘 소화해내어 지금은 일반초등학교 2학년으로 잘 지내며 이중언어를 잘 소화하고 있다.
나에게 전화한 친구의 아들 처럼 우리 둘째는 지금 24개월이 지났는데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 둘째는 빠르다더니 웬걸. 그러나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전반적인 발달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아이라면 언어도 조금 느릴 수는 있어도 종래에는 터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이중언어를 습득하다 보니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은 더 복잡할 것이며 그 작은 머릿속에서 혼란이 쌓이고 쌓여 금방 정리가 되지는 않지만, 두 언어의 근간들이 잠재해있다가 마침내 혼란 속에서 나름의 질서가 잡혔을 때 입 밖으로 표현되어 나온다. 말문이 터지는 시기가 좀 늦을 뿐 종래에는 영어, 한국어 둘 다 잘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단, 아이가 살고 있는 나라의 말을 압도적으로 잘하게 되므로 나머지 한 언어는 부모가 지속적으로 노출 및 학습할 수 있게끔 신경을 반드시 써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살고 있지 않은 나라의 언어는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갖고 있다. 아이들을 믿고 기다리면 된다. 아들의 말이 느려서 고민인 친구 엄마에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자신있게 답장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