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소녀가장 8
현정이가 친정부모님과 합가 해서 사는 동안 품었던 소원이 있다. 평일에 월차를 내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뒹굴거리며 현정이가 좋아하는 '효리네 민박' 같은 예능 한 편을 방해받지 않고 완주하는 것이었다.
당시 현정이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회사보다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를 주는 곳이었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엄마는 하루 종일 참고 있었던 누구누구 험담 레퍼토리를 봇물 터지듯 쏟아놓았고, 현정이의 동선을 따라 엄마의 목은 CCTV처럼 부지런히 방향을 회전했다.
어느 순간부터 현정이는 엄마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티브이 볼륨을 올리거나 먼 산만 바라보는데도, 엄마에게 현정이의 리액션은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던 듯 보였다. 엄마에게는 '말하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듯 보였다.
친정부모님과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살게 되면서 엄마의 인간 CCTV에 노출되는 시간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했던 현정이는 곧 실망했다. 손주 둘과 딸 내외와 늘 시끌벅적한 저녁시간을 보내시다가 컴퓨터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빠와 단 두 분만 계시니 적적하셨던지 엄마는 수시로 현정이 집으로 넘어오셨다.
냉동실에 있는 음식재료가 핑계였다. 합가 해서 사는 동안 엄마가 살림하며 쓰던 현정이의 냉장고에는 엄마가 사놓은 식품재료들이 가득했다. 손주들 돌보느라 마트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인 엄마는 매일매일 마트에서 뭔가를 사서 속이 보이지 않는 검은 봉지째로 냉동실에 얼리셨다.
한 번은 내가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사서 현정이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을 넣으려고 냉동실 문을 열었다가 문을 여는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검은 봉지들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현정이도 아이스크림 컵 하나 둘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빈 틈이 없는 냉동실이 답답했지만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네 아이 키워주느라 생판 모르는 곳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데 지금 네 집이라고 네가 나한테 눈치 주냐고 섭섭해하실 것이 때문이다.
현정이가 친정으로 바로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숙제를 봐주려고 앉을 즈음이면 어김없이 "띠띠띠띠~."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들어왔다. 어떤 날은 멸치를 가지러 오셨고 어떤 날은 참깨를 가지러 오셨다. 냉동실 문을 열어놓은 채로 이 봉지 저 봉지 열어보며 엄마는 쉴 새 없이 그 '험담 레퍼토리'를 쏟아내셨다. 엄마의 방문에 따라 냉동실 속 재료들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다.
분명히 분가를 했는데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엄마의 '냉동실 셔틀'이 이어지던 어느 주말, 현정이는 냉동실 속의 모든 검은 봉지를 모조리 꺼내어 유모차에 가득 싣고 친정집 초인종을 눌렀다. 현정이는 엄마께 자기는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제 엄마가 다 보관하시고 냉동식품 찾으러 우리 집에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우리 집에 올 때는 초인종을 눌러달라고도 덧붙여 부탁드렸다. 이제 집에 어르신들이 없으니 현정이 남편이 집에서 복장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로이 지내게 되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면 샤워하고 벌거벗고 나오는 사위와 마주치는 민망한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냐고 좋게 말씀드렸다.
평생 동안 자식이 부모와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의 총량을 합가 기간 동안 다 써버린 것 같은 느낌인 현정이는 저녁식사도 굳이 친정에서 먹지 않고 바로 내 집으로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 눈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딸이 배달음식과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울 것이 뻔했다. 또, 손주들이 둘 다 초등학생이 된 지금은 전보다 손주들에게 손이 갈 일이 많이 줄었는데도 손주들이 갓난쟁이 일 때 받던 수고비 월 210만 원을 여전히 딸에게 받고 있는터라 엄마는 딸에게 무언가 더 해주고 싶은 의무감이 들기도 했다.
딸 가족의 저녁식사를 손수 챙기는 것은 자식, 손자 챙기는 엄마의 모성애이기도 하지만 수고비에 대한 엄마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렇게 현정이의 '친정과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는 평일에는 친정으로 퇴근해서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주말에는 일요일 저녁에만 다 같이 외식을 하는 것으로 루틴이 잡혔다. 현정이는 이 정도만으로도 숨통이 트이고 살 것 같다고 했다.
사진출처 : https://www.calipsa.io/blog/cctv-statistics-in-the-uk-your-questions-answe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