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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점코치 모니카 Sep 02. 2022

아스퍼거 남친의 소통법

문자 그대로! 곧이 곧대로!

호주 반지갑은 펼쳤을 때 지폐 수납 부분 맨 뒤 칸의 전면에 지퍼가 달려있고 동전 보관용으로 쓰인다. $2짜리 호주 동전은 2000원에 가까운 큰 가치인만큼 동전을 소중히 여겨야 되서 그런가보다.  신기한 그의 지갑을 구경하다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사진이 담긴 명함 크기의 카드를 발견했다. 특별한 쓸모는 없어 보이는, 그냥 문구점에서 파는 장식용 카드였다. 


“이게 뭐야? 이걸 왜 갖고 다녀?”


“거기 쓰여 있는 문구가 너무 좋아서.”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후 바다에 빠진 두 남녀 주인공이 구출되기를 기다리던 장면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바다 위에 떠다니는 문짝 같은 나무 판 위에 케이트 윈슬렛을 올려놓고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한다. 


“Never give up” 


서서히 얼어 죽어가는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며 “Come back” 만을 수십 번 외치다가 케이트 윈슬렛이 마침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손을 놓고 마는 그 장면이다. 

조금 다른 이유로 나는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타이타닉을 봤을 때는 무려 중3 때 였다. 


“컴백! 짹! 컴백!” 


그 장면에서 케이트 윈슬렛이 쉰 듯한 목소리로 짹짹 거리는 것이 너무 웃겨서 친구들이랑 며칠 동안이나 케이트 윈슬렛 성대모사를 하며 깔깔댔던 장면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건 진짜 중요한 거야. 내 인생의 모토야. 이 카드 너 가질래? 나한테 진짜 소중한 거니까 너에게 주고 싶어”


이 남자 이렇게 감성적일 건가? 타이타닉 카드를 그에게 선물 받은 날, 우리는 다시 마운틴 쿠싸를 찾았다. 예의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참 브리즈번 야경을 바라보다가 그가 말했다.


“우리 영원히 함께 했으면 좋겠어. 네가 한국에 돌아가야 되고… 여러 가지 이슈들이 있지만… 타이타닉 카드에서 쓰여있는 것처럼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응, 나도 그래”


“정말? 우리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


“그럼 당연하지”


그날 우리의 대화를 라이언은 결혼 약속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이 폰은 바다 깊은 곳에 던져버려요”라고 박해일이 말한 순간을 탕웨이가 “당신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날” 로 기억하듯, 라이언은 그날을 우리가 결혼을 약속 한 날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 역시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고 그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결혼이라던가 백년해로 따위를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한 대답은 아니었다. 눈에 콩깍지가 씐 남녀들이 하는 대화가 다 그렇지 않나? 영원히 함께 하자는 남자에게 진지하게 앞뒤 상황을 다 따져가며 “나는 싫거든?”이라고 찬물을 끼얹을 여자는 없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영화 헤어질 결심 중에서

그제야 그가 재차 같은 질문을 물어보고 내가 동의하자 무척 기뻐했던 것도 생각났다. 그에게 그 고백은 여느 커플들이 흔히 주고받는 꽁냥꽁냥한 로맨스 드립이 아니었다. 혼자서 마음속 깊이 오래오래 준비해 온 묵은 고백이었다.


사회성이 부족한 아스퍼거인들은 타인과 대화하는 행위 자체를 힘들어 한다. 그들이 '그냥' 혹은 '별 뜻 없이' 말을 하는 경우는 없다. 무슨 말을 했다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반드시 지킨다. 자신이 빈말은 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도 빈말을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 라는 끝인사를 들으면 몇월 몇시에 시간 되시냐고 되묻는다. 비아냥거리는 톤앤매너나 반어법 처럼 뒤틀린 표현은 당연히 알아차리지 못한다. 분위기 파악 못하고 눈치없다고 늘상 비난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스퍼거의 사고 흐름을 통해 우리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본다. ‘영원히 함께 한다’는 약속이 지켜지려면 우리 두 사람이 결혼해서 아이 낳고 가족이 되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 하는 과정이 필요충분조건이다.   


복기 과정에서 그가 무언가 속마음을 고백할 때는 우리가 항상 늦은 밤 마운틴 쿠싸에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연애 초기, 그의 사회성이나 대인관계 기술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우리 사이에서 저돌적인 멘트를 하거나 먼저 행동하는 쪽은 항상 그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선수인가 착각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리드해온 그였다. 사회성 결여가 주특징이라는 아스퍼거증후군을 그가 갖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중에서야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항상 어둠 속에 있었단 걸 깨달았다. 아이컨택트를 못하고, 대화 시 상대방의 반응에 대해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는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그는 '어둠'이라는 버퍼가 필요했을 것이다. 마운틴 쿠싸의 칠흑 같은 어둠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꾹꾹 눌러놓았던 속마음을 편안하게 꺼내놓게 만드는 맥주 한잔 같은 효과를 주었다.

      

한국 나이 24살, 대학교 4학년, 벌써 결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 흐름이 나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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