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라이언 고즐링 할 때 그 라이언이 그날도 역시 11시 30분에 왔다. BLT버거와 립톤 그린티 맛 아이스티를 또 주문했고 계산을 하다가 갑자기 나에게 기혼이냐고 물었다.
"What? I am too young to marry!" 왓!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린데요.
"How old are you then?" 몇 살이신데요?
갈수록 가관이었다. 서양에서는 여자 나이는 안 묻는 게 에티켓이라던데 이 남자가 대놓고 나이를 물어본다.
"I am only 22." 겨우 22살이라고요.
'나 이제 겨우 22살(한국 나이 23살)인데 지금이 조선시대냐. 벌써 결혼을 하게. 내가 그렇게 늙어보이냐. 아줌마 같다는 거냐 뭐냐. 그리고 무슨 여자 나이를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냐. 서양 사람이면 에티켓을 더 잘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 어디서 배워먹지 못한 행동이냐.'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영어가 짧아 단답만 하고 있는 내 처지가 한탄스럽기만 했다.
"Very good." 아주 좋아요.
"Good? What's good?" 좋다고요? 뭐가 좋은데요?
호구조사도 아니고 혼인 여부와 나이, 국적, 성별까지 다 파악하고는 베리굿이란다.
'뭐가 좋다는거냐. 어린 게 좋다는거냐. 미혼인 게 좋다는거냐.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가. 네가 뭔데 나를 판단해!'
"Ah... I mean... Would you like to have dinner with me sometime?"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저랑 언제 저녁 같이 드실래요?
'뭐래. 이 흐름은 뭐지?'
호구조사 끝에 데이트 신청이 따라왔다.
"Ah... Well... I will think about it." 아... 음... 생각해볼게요.
데이트 신청에는 생각해본다고 한번 튕기는 게 국룰 아니던가. 습관처럼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Ah OK. Thanks, Monica."
또 "땡큐 모니카"를 하고 나갔다. 버거가 고맙다는 건지, 미혼인 게 고맙다는 건지, 튕겨서 고맙다는 건지 당최 흐름을 따라갈 수 없는 괴상한 대화였다.
영화 '노트북'의 라이언 고즐링은 참 로맨틱하던데 이 동네 라이언은 참 요상했다. 사장님 부부와 동료 직원은 주방과 매장을 분리한 가벽에 들러붙어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고 했다.
라이언을 평소에 되게 점잖게 봤는데 상당히 직설적이라며 그들도 놀란 눈치였다. 남자 사장님은 뭐든지 분명히 하는 건 좋지 않냐며 괜히 유부녀이거나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말실수하는 거보다 사전에 확실히 체크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하셨다. 사모님과 여직원은 여자가 너무 쉬워 보이면 안 된다고 튕기길 잘했다며 며칠 후에 한번 더 데이트 신청을 해오면 못 이기는 척 받아주라고 했다.
우리 카페에서 내가 일한 첫날에 내 이름을 물어본 뒤 매일 점심을 사 가면서도 그가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데는 3개월이 걸렸다. '생각해볼게'라고 내가 한번 튕긴 뒤로도 매일 와서 점심을 사 갔지만 그는 나에게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다. 느낌 탓일까? '생각해볼게' 사건 이후부터 그는 약간 주눅 들고 슬퍼 보였다. 아마 '생각해볼게'를 완전한 거절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항상 별말 없이 11시 30분에 와서 BLT버거와 립톤 그린티 맛 아이스티를 사 갔다. 매일 같은 것만 먹는 게 지겹지도 않나. 립톤 그린티 맛 아이스티가 단종되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서빙만 하는데도 지겨워서 자체 단종을 시켜버리고 싶은 장난기가 일 정도였다.
"Here you are. Your BLT burger and the iced tea." 여기 버거랑 아이스티 나왔습니다.
"Thanks, Monica" 땡큐 모니카
그의 입에서는 'BLT버거', '립톤 그린티 맛 아이스티', '땡큐 모니카'가 3종 세트로 반복 재생되었다. 이 지루한 무한루프를 깨부수어버릴 순간이 왔다.
"Anything else?"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실까요?
"No, thanks." 아뇨.
"What about my number?" 이를테면 제 번호라던가?
"Oh that, I will take that!" 오! 그거라면 받아야죠!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번호가 적힌 영수증을 받아갔다.
그가 나가자 주방에서 사장님 부부와 동료가 나와 호들갑을 떨었다. '저 남자가 데이트할 때도 저 봉고차를 몰고 나오면 어떡하냐, 다른 차가 있겠지.'부터 '데이트에도 유니폼을 입고 나오는 거 아니냐, 쟤 좀 이상하니 충분히 그럴 소지가 있다.'까지 난리가 났다.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지만 내게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매일매일 나를 보러 오는 그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무엇보다 '생각해볼게' 사건 이후 너무 죽상을 하고 다녀서 이 남자를 구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운명이 있다면 나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https://www.intofilm.org/films/2925
이제는 아스퍼거 신드롬에 대해서 알기에 밀당이나 기싸움 따위는 하지 않는다. "Try harder. 한 번은 튕겨야지."의 뜻으로 던진 "I will think about it. 생각해볼게."이 라이언 일병에게 한 달이 넘는 마음고생을 안겨주었다. 진부한 연애 이론서에 나오는 흔해 빠진 밀당 대사도 아스퍼거들은 곧이곧대로 이해한다. 아스퍼거와의 연애에서는 돌직구만 통한다.
연애에 있어 아스퍼거 신드롬 덕을 볼 때도 있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아스퍼거 신드롬의 똥고집 특징 덕에 라이언은 나에게 거절당했다고 생각했음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네가 좋으니까. 네가 보고 싶으니까 매일 보러 갔어.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