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공포증 2
보다 못한 카메라맨이 같은 반 아이에게 소녀에게 말을 걸어보라고 시킨 것 같다. 같은 반 아이가 소녀 곁에 다가가 물었다.
"00야, 왜 그래? 왜 밥을 안 먹구 이러구 있어?"
"숟가락... 숟가락... 숟가락이 없어서... 엄마가 안 넣어줘서... 숟가락... 숟가락..."
"아, 숟가락 안 가져왔구나? 내 숟가락 빌려줄까? 난 젓가락으로 먹으면 돼."
"어, 어."
소녀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녀는 친구가 빌려준 숟가락으로 무사히 점심식사를 마쳤다. 카메라맨이 따로 소녀와 인터뷰를 했다.
"같은 반 친구에게 숟가락 빌려달라고 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요?"
"네"
"그게 왜 그렇게 힘들었어요?"
"거절할까 봐. 친구가 싫다고 할까 봐"
한국 사람들은 수저 세트를 들고 다닌다. 숟가락을 빌린다고 해도 상대가 밥을 아예 못 먹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급우 사이면 그 정도 도움은 당연히 주고받을 수 있다. 아스퍼거신드롬을 가진 소녀에게는 숟가락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나 보다. 10년도 전에 본 다큐멘터리 속 소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라이언에게 물어보았다.
"라이언, 지금 네가 고등학생이야.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열었어. 샌드위치 같은 거 아니고 파스타처럼 반드시 수저가 있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점심이라고 쳐. 그런데 어머니가 깜빡하셨는지 수저가 없는 거야. 어떻게 할 거야? 다른 친구들도 다 파스타 같은 거 싸와서 잘 먹고 있는 상황이고 말이야."
"하이스쿨? 고등학생 때라고? 점심 안 먹지. 그날은 밥 못 먹는 거지."
'하이스쿨' 이란 단어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의 외로웠을 학교 생활이 짐작되어서 마음이 아팠다.
"왜? 왜 밥을 안 먹어? 친구들도 다 파스타 먹고 있다니까. 친구들한테 수저 빌릴 수는 없는 거야?"
"나는 못 물어봐. 점심을 안 먹고 말지. 하이스쿨 때라며. 그때는 더 어렸을 땐데... 남들한테 그런 거 못 물어봐. 거절당할까 봐. 거절당하면 나는 대미지가 너무 커."
지금이라면 물어볼 것도 같지만 하이스쿨 때라면 어림도 없다며 무조건 밥을 안 먹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스퍼거 신드롬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의 것이었다. 무언가 도전하고 행동해야 되는 순간에 그들을 저지하는 것은 바로 거절에 대한 극한 공포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라이언은 아담처럼 처음 보는 사람에게 천체 우주에 대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도 아니고 여자 친구와 데이트 중에 "나는 지금 성적으로 흥분되어 있어. 너도 그러니?"라는 괴상한 말을 하지도 않았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기 일을 미루면서까지 친절하게 도와주는 젠틀맨이다. 심지어 마음에 드는 카페 아르바이트생에게 데이트 신청까지 한 용기 있는 상남자다.
내 눈에는 영화 속 아담이나 다큐멘터리에 나온 소녀는 라이언과는 다른 중증의 아스퍼거 신드롬을 가진 극단적인 사례로 보였다. 하지만 라이언은 자신이 그들과 똑같다고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라이언은 27살이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27살 남자라면 군대 다녀와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거나 취업을 준비할 나이라 인생의 경험치가 높지 않을 수 있는 시기이다.
라이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혼자 프랑스로 건너가 프로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계속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고 유럽 전역으로 거듭 이동하는 상황이었다. 아스퍼거 신드롬을 앓고 있는 만 17세 소년이 그런 환경에서 가족도 없이 수년간 살아내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거절이 무엇보다 두려운 사람이었지만 거절의 공포에 정면으로 맞서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을 수없이 맞이하며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했다. 말을 많이 했을 때 상대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 경험이 쌓여 실수 할바에야 차라리 입을 닫고 과묵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도움을 제안했는데 혹여 상대가 싫다고 할 것이 두려워 가만히만 있었던 경험들은 자신에게 싹수없고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난으로 돌아왔다. 억울한 마음에 용기를 내어 사람들에게 도와줄까라고 몇 번 물어보았더니 상대가 거절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고마워하고 칭찬해주었다. 이제는 어딜 가나 오버해서 남들을 챙기다 보니 젠틀맨 소리까지도 듣게 되었다.
살면서 거절이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해 놓친 일들이 너무 많아 아쉬운 기억들이 가득하다. 거절공포증 때문에 이번에도 카페 아르바이트생 모니카를 놓친다면 가슴속에 한(恨)이 생길 것 같았다. 100일에 걸쳐 매일 밤 욕실 거울 앞에서 대사 연습을 하고 모니카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대화할 때 눈 맞춤을 하지 않아 무례하다는 비난을 하도 들어서 중요한 이야기는 이동할 때 차 안에서 한다. 차에서 대화를 할 때는 화자와 청자가 나란히 앉아 전방만 주시한다. 아무도 눈 맞춤 이슈에 대해 태클을 걸지 않아 편안함을 느낀다.
로맨스를 추구한다는 명목 하에 깜깜한 밤 마운틴 쿠싸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사랑고백을 했다. 고백처럼 중요하고 떨리는 이야기를 상대와 눈 맞추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운틴 쿠싸에 올라갈 수 없을 때는 맥주 몇 캔이 망막에 암막커튼을 씌워준다. 알코올이 좀 들어가면 말싸움에 져 본 적이 없다는 '타이거 모니카'라도 똑바로 쳐다보고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아담과 다큐멘터리의 소녀와 똑같이 아스퍼거 신드롬을 갖고 있지만 라이언은 사회 속에서, 직장 속에서, 가정 안에서 섞여 살아가고 있다.
거절을 거절하는 것은 여전하다. 하지만 거절당하는 상황을 맞닥뜨린다고 해도 어릴 때처럼 마음속에 피가 줄줄 흐르지는 않는다. 이제는 싸구려 밴드로도 금방 지혈이 가능할 만큼 정서적 맷집을 길렀기 때문이다.
아스퍼거 신드롬이 시술을 받거나 약을 먹는다고 해서 짠 하고 치료될 수는 없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본인만의 서바이벌 노하우를 체득하면서 타고나지 못한 사회성을 조금씩 기를 수 있다. 꾸준한 훈련과 학습, 주변인들의 도움이 있다면 아스파거 신드롬이 있어도 괜찮다. 아스파거 신드롬은 반드시 개선의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