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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점코치 모니카 Oct 21. 2022

아스퍼거 남친과 결혼해도 될까요?

결혼을 결심한 순간



사진출처: https://www.etsy.com


TV를 보면 '결혼을 결심한 순간?'에 대해 로맨틱한 썰을 푸는 연예인들이 많던데 우리 커플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혼인신고부터 했다. 고려대 어학당 두 학기를 등록하여 딱 재학기간만큼의 학생비자를 받아 입국한 라이언의 비자 만료 시점이 다가왔다. 특별히 공부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금 사정도 뻔한데 마냥 학생 신분으로 살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호주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모두 버리고 낯선 나라로 날아온 그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했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나만 결단을 내리지 못해 미적대고 있었다. 


대부분 20대에는 결혼은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만나보는데', 우리 커플은 '만나보려면' 당장 결혼부터 해야 했다. 지척에서 서로 얼굴을 보고 지내려면 라이언의 한국 거주문제가 우선 해결되야되니 말이다. 사랑하는 마음이야 넘쳤지만 결혼은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나에게 너무나 거대하고 무거운 사건처럼 느껴졌다. 

결혼은 서른 너머 일어날 막연한 일이며, 무언가 경제적,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빡!' 하는 확신이 들 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1-2년 정도만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이역만리를 날아온 사람에게 '나는 아직 어리고 결혼은 좀 천천히 생각해보고 싶으니 다시 돌아가 줄래?'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라이언도 그즈음 속으로 엄청 답답했을 거다. 하지만 그가 먼저 비자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내거나 혼인신고 (Paper marriage)라는 옵션에 대해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 가만히 기다려준 것도 있지만 거절을 극도로 힘들어하는 아스퍼거 입장에선 이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을 것이다.     


받아놓은 날짜는 다가온다. 비자 만료를 겨우 한 달 정도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라이언이 봉급 봉투를 들고 왔다. 일을 하고 싶다길래 당시 유행하던 A4 용지 아랫부분에 뜯어갈 수 있는 휴대폰 번호가 팔랑팔랑 날리는 스타일로 '영어 테니스 레슨' 전단지를 만들어 주었다. 둘이서 고대 주변 일대를 돌며 전봇대란 전봇대에는 모두 전단지를 붙여놓았더니 정말로 몇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택배사업을 하기 전에 프로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던 경력이 있던 라이언은 주변 대학생들에게 영어로 테니스를 가르쳤고 레슨비로 50만 원을 받았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돈을 번 것이다.


어깨에 테니스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흰 봉투를 꽉 쥔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카페에 들어온 그는 나를 보자마자 봉투를 건네주었다. "너 가져.", "You can keep it." 


호주에 있을 때는 라이언이 항상 데이트 비용을 냈다. 서양에서는 데이트 비용도 무조건 더치페이하는 거 아니냐며 나도 내겠다고 하자 학생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항상 라이언이 계산을 했다. 이제는 라이언이 학생이니 내가 갚을 차례라서 한국에서 데이트 비용은 내가 쓰고 있었는데 그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경제적 독립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자란 그가 나이 서른에 갑자기 학생 신분이 되고 줄어드는 통장잔고의 압박을 느끼는 상황이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야, 이런 의미 있는 돈을 나에게 주는 거냐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라이언이 혼자서 조용히 읊조렸다. 지나가듯 흘린 그의 혼잣말이 내 가슴에 와서 박혔다. 


"휴... 드디어 나도 여기서 돈을 벌었구나..."

"Phew.... Finally I made some money here ay...."   


라이언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피치 못할 상황이라 해도 남자가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평생 일을 하다 말다, 돈을 벌다 말다 하며 어머니에게 의존해서 사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나였다. 남자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없을 때 배우자로서 여자의 삶이 어떤 건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자식들의 삶이 어떤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 배우자는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아빠가 못 가진 그것만큼은 꼭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뼛 속에 새겨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해 스스로 생계를 꾸려온 라이언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휴식이라면 휴식이고, 호주에서 데이트 비용을 펑펑 썼으니 그걸 되받을 정당한 자격도 있다. 무엇보다 나 하나 보고 낯선 나라에 날아와 준 것 자체로 그가 한국에서 정착하기까지 도와줄 의무가 내게 있다. 사랑은 둘이서 하는 건데 내가 호주가 싫다고 해서 그가 한국으로 와주었으니 그의 희생에 대해 응당 갚아야 할 도덕적 보답이다.     


내가 아무리 이런 말을 해줘도 라이언의 내적인 불편함이 가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스퍼거신드롬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규칙이나 법칙이 머릿속에 들어오면 그것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는다. 추후에 그 생각이 변화되거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규칙을 적용하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할 때 고집이 세다거나 너무 FM 식이라는 등 융통성이 없다는 평을 듣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에게 성인으로서 한 인간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이다. 특히 남자가 금액의 크고 작음을 떠나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문제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실패자라는 인식이 단단히 각인되어 있다. 시기와 상황 상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들이 넘쳐나는데도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혼인신고를 생각하면 피어나던 이유 모를 내 불안을 그의 수치심이 잠재워주었다. 혼란스러웠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호주에 계신 라이언 부모님께 서류를 요청드렸고 바로 다음 주에 휴가를 내고 시원하게 혼인신고를 했다. 


연예인들의 썰처럼 로맨틱하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가슴속에 새겨진 '결혼을 결심한 순간'인데 라이언은 저 말을 한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은 언제 나랑 결혼하겠다고 결심했어?"

"그 카페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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