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와플 그리고 인종차별이다. 이 나라 이미지는 이 두 개 이외에는 떠오르지가 않는 걸 보니 나라 홍보가 덜 된 게 분명하다. 게다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유럽의 인종차별 이야기 중 최고봉이 벨기에라고 하여 이 나라는 여행지에서 한 번도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당장 보르도를 가지 못하는데 날은 너무 추워서 천년의 요샌가 뭔가 하는 몽쉘 미셀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 개의 선택지를 제외하면서 눈에 2차 핏발을 세우며 여행지를 찾는데 눈에 띈 것이 바로 벨기에였다. 여행 어플에서 벨기에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소규모 투어를 찾은 것이다.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여럿이 가는 여행이라 괜찮을 거라 생각했고 프랑스 전역으로 가는 기차가 거의 끊기다시피 한 상태여서 대안이 없어 예약을 했다.
결정장애는 넣어둬
나는 어딜 가도 좋았으나 엄마는 어떨지 몰라 조심스럽게 벨기에에 가보고 싶냐고 물었다. 역시나 엄마는 용감했다. 벨기에든 어디든 가자고 했다. 이럴 때 보면 엄마의 용기는 대단한 것 같다. 아무리 딸과 같이 간다고 하지만 이 못 미더운 딸 하나 믿고 이역만리까지 와서 기차도 취소되고 노숙자 신세가 될 뻔했지만 엄마는 항상 침착했다.
난 인종 차별당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에 망설였는데 엄마는 “그까짓 것 당하면 어때, 그런 걸 하는 놈이 나쁜 거지 우리는 무시하고 재밌는 구경 하면 돼”라고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 거침이 없다. 다행히 이 날의 선택은 여행 중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날 인생 최고의 와플을 만났기 때문이다.
어느 새벽, 큰 승합차를 타고 프랑스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세 가족이 함께 벨기에로 떠났다. 뉴욕에서 온 부부, 아들과 결혼 기념으로 온 50대 부부, 그리고 우리였다. 딸과 둘이 여행 온 우리를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엄마는 그 말에 어깨가 한껏 솟아올랐다. 나는 온 가족이 같이 오거나 부부가 사이좋게 온 게 부러웠는데 사람은 역시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나 보다.
새벽부터 시작된 일정에 차 안에서 모두 가이드 설명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도 맨 앞에서 운전기사와 엄마 사이에 낀 채로 꾸벅이를 했다. 그러다 문득문득 눈을 뜨면서 신기한 광경을 봤다. 우리나라는 고속도로든 어디든 도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산이 병풍처럼 펼쳐지는데 이 나라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지다. 진짜 그 평지에서 소가 풀을 뜯어먹고 있다. 마치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본 것 같은 풍경이 펼쳐져 엄마를 깨웠다. 엄마는 아까부터 보고 있었단다.
중세의 도시 유적, 브뤼허의 타임슬립
벨기에 여행은 먼저 수도인 브뤼셀 인근의 도시 브뤼허에서 시작했다. 브뤼허는 중세시대의 건물이 보존되어 있는데 도시 유적이다. 1600년대 1700년대에 세워진 건물이 즐비한 이곳은 유럽에서 신혼여행지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100년 정도 된 것은 오래된 건물에 이름을 내밀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신기한 것이 건물에 숫자가 쓰여 있는데 건물을 만들었던 때의 연도를 적은 것이다.
고풍스러움뿐만 아니라 타임슬립을 한 것처럼 도시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몇 백 년 동안 한 자리에 서 있던 건물, 울퉁불퉁한 돌길이 비가 와서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비췄지만 그래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중세를 만끽하기 충분했고 내가 1600년대로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감자튀김, 넌 정체가 뭐냐
새벽부터 달려온 터라 배가 고팠던 우리에게 가이드가 식당을 골라줬다. 워낙 의심이 많아 가이드가 소개한 식당은 맛이 그저 그럴 거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갔지만 지금도 생각이 날 만큼은 너무 맛있었다.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엄마도 이날 맥주에 심취했다.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에 잘 어울리는 소스가 곁들여졌고, 맥주 한잔으로 추운 몸도 녹였다. 감자튀김은 그냥 감자튀김인데 대체 왜 이렇게 맛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은 감자튀김인데 대체 무슨 마법의 기름으로 튀긴 걸까.
이곳에 와서 엄마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원래는 마시지 않았던 맥주나 핫초코, 원래는 먹지 않았던 감자튀김을 먹고 마시고 즐겼다.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이유가 컸다. 맥주야 여기서 사갈 수도 있고 수입한 맥주를 집에서 사서 마실 수도 있다. 어떻게든 사 먹으려 한다면 요즘 같은 시대에 못 먹을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날, 갑작스럽게 변경한 여행지인 벨기에의 한 중세 도시에서 분위기와 함께 마신 맥주는 돈을 얼마를 준다고 해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맛있었고 더 깊은 향이 났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광장으로 나갔다. 비도 오고 추운 날씨에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시청과 성당이 있는 광장은 말과 마차가 지나다니면 17세기 풍경을 연출했다. 우리는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한 시골마을의 포도밭에 가 있을 상상을 했는데 우린 벨기에의 1600년대를 거닐고 있는 것이다.
홍콩의 야경 미안.. 눈이 부시던 브뤼셀의 야경
오후 느지막이 브뤼셀로 이동을 했다. 브뤼셀의 시청이 있는 광장, 그랑플라스에서는 밤에 야경 쇼가 펼쳐지는데 홍콩에서 봤던 심포니 오브 라이트와 맞먹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홍콩은 화려함에 정신을 쏙 빼놓는 즐거움이 있다면, 브뤼셀의 화려함은 사람을 아예 홀려버리는 매력이 있었다. 흘러나오는 음악, 중세를 간직한 건물을 비추는 화려한 불빛,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내 오감을 모두 만족시켜줬다. 엄마는 홍콩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시간으로 바뀌는 불빛을 스마트폰에 담느라 폰을 휙휙 돌려가며 영상을 찍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게 더 이쁘고, 영상은 내가 찍는다고 했지만 엄마는 직접 엄마의 스마트폰에 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야경 쇼를 스마트폰에 담고 나는 그런 엄마의 역동적인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