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지막 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초란 Feb 10. 2022

마지막 날만큼은 대유잼이고 싶다.

넌 일주일에 딱 한 번만 보면 엄청 웃긴데, 그 이상 보면 질려.

내일 회사에서 발표할 원고를 쓰고, 그 원고를 씹어먹을 때까지 연습하니 벌써 9시이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었다. 그다지 대단한 발표도 뭐도 아니다. 20분 정도 되는 설명이다. 별것도 아닌 발표에 왜 시간을 이렇게 까지 들이고 있냐하면 스스로도 '난 말을 못 한다'는 강박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렸을 때부터 말을 못 하는 것으로 엄마한테 혼나기도 부지기수였다. 지금은 글로 이렇게라도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어디냐 싶다. 그렇다 해도 여긴 외국이고, 어느 정도까진 외국인 버프가 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매주 있는 발표를 이렇게까지 준비한다고는 부서 사람들 아무도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넌 일주일에 딱 한 번만 보면 엄청 웃긴데, 그 이상 보면 질려.


고등학생 때 친구한테 들은 말이다. 이 소리를 듣고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웃기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들킨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모두 화술이 출중하다. 얼마나 대단하냐면, 5살 때 동생이 유치원에서 우주랍시고 그려온 그림이 있었는데 스케치북은 검은색이 칠해져 있을 뿐이었다. 칠흑 같은 우주의 어두움을 표현했나 싶었는데, “스케치북 밖에 오색찬란한 행성이 있고 거기를 우주비행사가 가서 어쭈구 저 쭈구… “ 소설 한 편 뚝딱 지어낸다. 게다가 굉장히 재미있다! 멀쩡히 우주를 그린 나는 설명을 못 해서 상상력이 빈약한 애가 되어버렸다. 동생뿐만이 아니다. 아빠고 엄마고 모두 말을 찰지게 잘하고 무엇보다 웃기다. 어디를 가던 화재의 중심이고 그 화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같은 DNA인데 나만 노잼이다.


어렸을 때부터 설명충에 분석충에 진지충에 꼰대였던 나는 영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다. 웃긴 사람들(가족)을 길게 봐온 내가 내린 결론은 “웃기는 사람”은 날 때부터의 센스다. 후천적으로 노력을 한다한들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딴 것을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노력’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벌써 난 대노잼 확정이다. 태생이 웃긴 대유잼들이 나를 볼 때 얼마나 측은할까. 아니, 이해를 못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왜 저렇게 재미가 없을까?’라고 나를 고찰하고 있을지도.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웃기 것과 종이 한 장 차이의 ‘이상한 사람’이었다.

후천적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이상한 사람’은 ‘웃긴 사람’과의 교집합 부분이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놓치고 싶지 않은 '웃긴 사람'과의 교집합


어차피 화술은 없으니까 평소엔 입 다물고 있다가 엄청나게 고심한 단어와 함축된 문장을 내뱉는 전략으로 갔다. 설명충에 분석충에 진지충에 꼰대인 나에겐 상당히 어려운 전이긴 하지만 어쨌든 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성공했다. 길게 하면 뽀록이 나니 단타로 짧고 굵게 가자는 것이다. 이런 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웃긴데 그 이상 보면 질린다’는 이야기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 역시! 길면 다 들켜버리는구나.’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더욱 ‘웃겨야 한다’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신경을 쓰면 쓸수록 점점 ‘웃긴’이 아닌‘이상한’에 가까워지고 있다. 노력(?)을 들키고 나서부턴 길게 보면 다 들키니까 연락도 잘 안 하는 사람이 되었다. 왜 이렇게 까지 웃긴 것에 집착을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제는 그냥 ‘이상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도 들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 날 ‘웃긴’ 사람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적어도 마지막 날만큼은.


요즘 드는 생각은 글은 어느 정도 쓰고 수정이 가능하니, 유서를 정말 맛깔나게 대유잼으로 써 볼까?이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진정으로 재미있는 유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아, 하지만 역시 대유잼은 나의 로망이다.

마지막 날을 이렇게 까지 준비하고 있으니 그날이 친구가 말한 일주일에 한 번 오는 대유잼의 날이길 빈다. 회사 발표 준비하듯 마지막 날의 원고를 준비해서 지금부터 연습을 해야 하나 싶다. (벌써 이걸 연습을 한다느니 준비를 한다느니 하는 시점에서 정말 성실하고 이상한 사람일 뿐, 웃긴 사람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과 미친 듯이 웃으면서 눈감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지막 날까지 아플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