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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Jan 19. 2021

'고마워'말하는 아내 vs '고마워'기다리는 아내

같은 역할 달라진 태도

주말 오전, 할 일이 밀린 내가 남편이 있는 방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집안 정리 좀 해줘."

해줘라는 말을 내 입 밖으로 내면서도 거슬린다. '뭘 해줘? 해주긴! 같이 사는 집인데 당연히 해야 하는 거지. 게다가 주말 오전에만 하는 거잖아. 주중에는 내가 다 하잖아.' 

하지만  이 또한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두 걸음 후퇴다. 특히 일을 시킬 때 부드럽게 말을 해야 더 잘 흡수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같이 하자는 말이 아니라 남편만 하라는 말이니까.

 "집안 정리 좀 해줘." 했으면 바로 방에서 나왔을 남편이 2분가량 있다가 나온다. 어미 하나 차이다.

2분이나 기다렸지만 눈썹을 가지런히 펴고, 

" 여기 재활용 박스 스티커 떼서 박스 해체해야 해."

남편 표정이 개운하지는 않지만 별말 없이 움직인다. 내심 "해"에다가 "줘"를 붙인 내가 대견하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고마워. 덕분에 그동안 난 일 하나 끝냈네"라고 말했다.

"고마워"란 말을 듣고 난 남편, 갑자기 다 해체한 박스를 줄로 묶기까지 한다.  수고의 시간은 지나갔고 고맙다는 말은 귓가에 남는다.  이로써 나는 집안일을 시킨 아내가 아니라 남편한테 고맙다고 말하는 아내가 된다.          



수십 년 전, 마찬가지로 바쁜 주말 10시경, 널브러진 집안을 바라본다. 점심 준비와 집안 정리까지 할 일이 많다. 냉장고를 열고 메뉴를 확인한 뒤 육수를 끓인다. 그리곤 집안 정리에 들어간다. 언뜻 보니 남편은 소파에 기대 좋아하는 프로그램 시청 중이다. 

갑자기 '낯선' 내가 불쑥 나타나 내 머릿속을 휘젓는다. '그래 남편도 일주일간 일했으니 주말은 쉬고 싶겠지.'

잠시 '낯선 나' 탓에 혼자 정리를 한다. 정리가 끝나고 바로 싱크대로 옮겨가 야채와 고기를 다듬고 전골을 끓인다.  감자 치즈구이와 샐러드도 한다. 그렇게 차린 식탁에서 먹고 일어나 싱크대에 쌓인 접시들을 본다. 

그제야 '낯선' 나는 퇴장하고 '익숙한' 내가 등장한다. 

'아 짜증 나. 남편만 일했나? 나도 일주일 내내 앉지도 못하고 서서 강의했는데. 심지어 출근시간도 내가 40분 빠르다고 (퇴근시간도 빠르지만). 게다가 집에 오자마자 아이도 보잖아. 밤새 수유도 하고 말이야.'

개수대 앞에 서서 수전 꼭지를 위로 올린 지 몇 분쯤 됐을까. 흐르는 물이 그릇에 고여 넘치자 그릇을 내려놓고 수전 꼭지를 아래도 닫는다. 거실로 성큼성큼 간다. 내가 다가가니 TV 보던 남편이 멀뚱하게 쳐다본다. 뭔가 예감이 안 좋은 걸 느꼈는지 살피는 눈치다.

"나 피곤해. 식기 정리 당신이 해."

남편은 내 낮은 목소리 톤으로 사태가 심각하지 않은 걸 확인한 모양이다. 다시 TV로 시선을 돌리며 다급하다는 듯 말을 한다.

"알았어. 알았어. 이것만 마저 보고."

다시 낯선 내가 나타난다. 

'하긴 보던 프로그램을 끊기는 힘든 것도 같다. 그렇다고 그릇을 저상태로 놔두면 말라서 치우기 더 힘들다.

또다시 혼동 상태에 빠진 나는 주춤하다 다시 싱크대로 간다. '에잇....'하고 식기 정리를 마친다. 그리고 나면 짜증이 올라온다.  체력 저하는 짜증을 가속화한다. 다시 TV 앞으로 다가간다.   

 "왜 나 혼자 동동거리며 이 집안일을 다해야 하지?"  

이번엔 볼륨이 높다. 가만히 TV 보던 남편은 주말에 좀 쉬려다가  아내의 짜증을 듣고 표정도 몸도 굳는다.  내가 오전에 혼자 일하는 동안 남편은 편안하게 쉬었다. 편한 시간은 쉽게 흘러간다. 그 뒤에 들은 짜증만 기억될 뿐이다. 남편에게 나는 묵묵히 혼자 일한 아내가 아니라 짜증 내는 아내로 남았다.     

 



묘한 것은 요즘,  수십 년 전에 비해 남편의 가사 분담 역할은 늘어났는데  오히려 남편이 더 흡족해한다는 것이다. 곰곰이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주요 기준이 아니었다. 마지막 반응, 고맙다는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가 주요한 기준이었다.

상대방에게  ‘고마워'라는 말을 "듣는 것", 의외로 의미와 보람이 크다. 좀 힘들었던 일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다. 피로는 사라지고 은근히 뿌듯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일하느라 첫맛은 쓰지만 고맙다는 말을 들 뒷맛은 향기로운 차와 같다.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을 대하면 다음에도 고마워할 일을 해줘야 할 것 같다.     


반면, 수십 년 전  내 행동은 아가들 감기 물약처럼 첫맛만 달콤하고 뒷맛은 씁쓸하다. 처음에만  달콤한 휴식을 제공하고 뒤에는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저 행동에는 여러 문제점이 숨어있다.      

일단, 나 자신조차 내 행동에 대한 명확한 선을 모른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인내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파악도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사 노동의 역할 분담에 대한 기준도 없이 상대방의 한마디에 따라 우왕 좌왕 한다, 정확한 선이 없이 참았다가 터지는 일상의 연속이다.     


또한,  소통의 실패다. 의사표현 능력과 전달력이 부족하다. 전반부까지는 말없이 혼자 청소해서 남편의 쉼을 지지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중간에 한번 식기정리를 요구하지만 이내 내 의견을 접는다. 강력한 의사표현을 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더 단호하게 "지금 보던 TV 그만 보고 도와줘"라고 하든지, 아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게 TV 다 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접시에 묻은 음식물이 굳는 것보다 생활태도가 굳는 게 더 문제다.

  

이렇게 나 자신의 인내심 한계를 잘 모르고 상대방에게 명확한 역할 분담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런 상황을 되돌아보면 대체로 마음속에서 잘못된 타협을 하고 있었다.       

'에이 치사하게 뭘 또 하라고 해?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어차피 애들은 엄마를 더 찾는데 뭐. 같이 힘든 것보다 남편이라도 쉬어야지.'   

'시켜서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알아서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역할 분담의 갈등을 회피하곤 했다. 

   

이런 생각은 혼자 일을 해낸다는 측면에서 인내심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내심이 약한 것이었다. 다툼이 지속되는 '갈등 상황을 견디는 인내심'의 부족. 그 순간 표면적인 평화를 선택하고 문제를 묻어두려는 나태함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변화는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가 있다. 마음의 평온만을 쫒으며 흘러가다 보면 제대로 된 방향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때로는  화해하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불편함을 견디는 것, 그런 과정을 지나 올곧은 길이 난다.   


수십 년 전 혼자 일을 다 하고 나서 짜증을 내는 태도는 다른 각도로 보면 오히려 일방적인 태도였다.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혼자 일을 떠안을 게 아니라면, 상대방 배우자의 역할 수행의 완성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기울어진 관계의 각도만큼 부정적인 감정이 고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균형은 장기적 관계일수록 중요할 수 있다.


과거의 나는 아내로서 "고마워"라는 말을 듣기 기다리는 구조로 일상을 유지했다. 그저 '충실한 아내'였다. 그러나 직장맘으로서 가사와 육아를 도맡으며 마음속에 억울함을 쌓아가고 있었다. 기울어진 관계에 불편하면서도 그 불편함을 견디고 있었다. 결국 기울어진 각도를 유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반면 지금은 "고마워"라고 직접 말할 수 있는 구조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로써 '고마워하는 아내'가 되려고 한다.  조금씩 마음속에 억울함을 풀어가고 있다. 기울어진 각도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선물도 주고받아야 하는 것처럼 고맙다는 말도 주고받아야 균형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관계 구조에 충실한 아내는 남편한테 고마워라는 말을 듣(기 기다리)고     

관계 균형을 이루는 아내는 남편한테 고마워라는 말을 (할 수 있게)  한다         


남편이 아내를 돕고 아내는 남편에게 고맙다고 한다.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음으로써 남편은 아내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고 자신의 '유력감'을 느낄 수 있다. 남편은 자신의 유력감을 느끼게 해주는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다. 주위를 돌아보면 내가 고마워하는 사람과 나한테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다.  

''나한테 고마워하는 사람" 에게 느끼는 감정은 또 다른 영역이다. 함께 있으면 나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 된 느낌이다.


주고받는 행동뿐만이 아니라 주고받는 말로도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때로는 말을 되짚어 보며 행동을 조율할 수 있다. 그런 균형이 관계의 균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느 한쪽만 고마운 관계는 시소가 늘 기울어진 채,  시소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수십 년간 역할 분담에 있어서 시소의 균형을 잡는 걸 외면해 왔다. 이제는 시소 기능을 다하도록 균형을 맞춰 보려고 한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소처럼, 아내가 "고마워" 말할 때, 남편은 "고마워"라고 듣고

남편이 "고마워" 말할 때, 아내는 "고마워:라고 듣는 관계, 그런 주고받음을 놀이처럼 이어나가려고 한다.


 

+> 이렇게 태도를 전환하는데 무려 25년이 걸렸답니다.;;;

     이 글은 과거의 저를 돌아보며 앞으로의 다짐을 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같은 X 다른 Y 시리즈 5>

                                                                                                             <사진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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