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기 위해 요리했다.
학원 강사였던 나는 밤늦게 퇴근하면 반찬을 만들었다. 그냥 밑반찬을. 왜 그렇게 열성적이었을까. 요리가 좋아서였을까. 몸의 허기만큼이나 마음의 허기도 채우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한 두 개의 반찬을 만들고 나면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맛깔나게 무친 나물 한 젓가락을 따뜻한 밥에 얹어 입안 가득히 넣고 우물거리는 상상을 하거나 소금에 절여 물기를 꽉 짠 오이를 새콤달콤하게 무쳐서 입안에 넣고 오독오독 씹는 등의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오이 반찬을 글라스락에 넣고 '따닥' 소리와 함께 뚜껑을 닫아 밀폐시킨다. 뭔가 해냈다는 후련한 느낌이 든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벌써 8년 전 이야기. '그냥' 음식 만드는 게 좋아졌다.
"왜 음악을 들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사람들의 대답은 "그냥 좋아서"일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영감을 준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밑도 끝도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좋아서'다. '좋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보상이 되고 의미가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사랑'도 그렇다. 상처 받을 줄도 알고 언제 가는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사랑한다. 그냥 사랑하는 그 자체로 우리는 압도적인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일 자체가 목적이자 보상이 되는 것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아지는 일은 우리에게 곧 행복이 된다.
반면에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면 그 일은 곧 싫증이 나버리거나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실망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심지어 좋아하는 일을 해도 그렇다.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내야 하는 일은 곧 스트레스로 이어지기 쉽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일을 하는 과정 가운데 생각지도 못하는 여러 가지 장애물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 일은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고통이다. 키케르 케고르에 따르면 '우리가 다른 이익이나 보상을 바란다면, 엄밀히 말해 단 한 가지만 원할 수 없다'라고 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 돈을 쓴다면 우리는 받기를 원할 것이고 사랑의 본래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결국 '절제의 기술'에서 스벤 브링크만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 본래의 목적과 의미는 사라지고 힘듦과 괴로움만 남는다. 순결한 마음의 상실이다.
바야흐로 자기 계발 시대다. 그 인기는 시들지 않는 것 같다. 이것만 하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책과 온라인 클래스가 쏟아진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도무지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고 내일은 오늘의 또 다른 연장이다. 매일이 비슷한 삶인 거다. 책과 클래스에서 이야기하는 운과 다이내믹한 변화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정말 내게도 행복이 찾아오는 걸까.
어느 날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내 삶에 불만이 생겼다. 자비를 털어 자기 계발을 할 만큼 열정이 가득했지만 그에 따르는 보상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은 스스로에게 점점 잊혀갔다. 오직 목표만이 남아 있었다. 처음 일을 시작했던 순수한 마음은 온 데 간데없었다. 오직 유명해지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현실은 그저 살아내야 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날마다 쌓이는 피곤함과 '이렇게 평생을 살 수 있을까'하는 불안함을 안고 살았다. 살고 싶다는 생명의 불씨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결국 일을 그만뒀다.
살아오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그래 있었다. 고등학교 때, 춤이 너무 좋아서 춤을 추기 위해 밤 잠 안 자고 비디오를 보며 안무를 따라 하고 외웠던 때가 그랬고, 음악이 좋아서 홍대에서 밴드를 잠시 할 때가 그랬다. 댄서가 되고 싶지 않다거나 드러머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리듬에 맞춰 동작을 하고 음악을 몸으로 표현하는 그 자체에 희열이 좋았고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당시 내게 내일은 단지 춤을 출 수 있는 기회이자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일 뿐이었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것들은 대부분 직접적으로 돈이 되거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꼭 해야 되는 필요한 일들이 아니었다. 음악이 그랬고, 춤이 그랬다. 그렇지만 그 순간들에서 나는 행복함을 느꼈고 먹지 않아도 입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마음의 여유도 있었다. 나는 드러머도 댄서도 되지 못했지만 열정을 다해 즐겨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보상을 얻었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일들'이 내게 행복을 느끼게 해 주었다.
요리를 하는 지금이 그렇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내게는 그저 놀이다. 이런저런 양념을 섞어 맛을 보기도 하고 레시피 책을 보며 따라 해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꿔보기도 한다. 채식을 하고 나서부터는 요리에 대한 관심이 더 커져서 채식하기 전에는 몰랐던 식재료까지 모두 섭렵할 수 있으니 만들 수 있는 음식도 많이 생겼다. 마치 마술을 부리듯 내가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개인 요리사를 둔 부자가 된 느낌도 든다.
그렇다고 매일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는 것도 아니다. 매일매일 조금씩 그 맛이 다르다. 때론 마음속의 이미지만 가지고 음식을 만들었는데 내가 먹기도 민망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실패도 아니고 평가받는 것도 아니고 비교할 대상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상상 속에서만 그려본 맛을 실제로 구현해봤다는 것,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맛이 없다는 것은 그냥 웃픈 상황일 뿐이다. 그냥 한 끼로 대신 때우면 그만이다.
나는 요리 안에서 진정 자유로웠다.
요즘은 무엇이든 수단으로 삼아서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일단 내게 이득이 되는지 안 되는지부터 심지어 돈이 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보기도 한다. 자기 계발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 일 자체를 하면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그것을 도구로 삼아 목표를 달성하는데 열을 올린다. 또한 세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계속 속삭인다. 우리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설득한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를 자기 계발과 성공의 신화 속에서 빠져나오게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고 신해철님은 한 영상에서 '성공은 운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누구나 성공은 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어떤 규모로 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성공만 바라면서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덧없다. 과연 미래에 우리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요리를 한다. 오직 나를 위해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음식을 만들어 맛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겁기 때문이다. 마음의 부담도 걱정도 없다. 어차피 매일 먹는 끼니 중에 한 끼 일 뿐이니까. 앞으로의 성공도 행복도 결국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는 것. 불확실한 미래에서 행복을 찾기보다는 현재라는 인생의 틀 안에서 즐길 만한 일을 하는 것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행복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금 내 생활 속에 잠들어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