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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Jan 02. 2023

굴 때문에.

탈 나고 철 든 이야기.

  연말연시를 노로 바이러스와 함께했다. 정말 뜻하지 않았다. 생굴을 먹고 나머지로 굴 떡국을 끓여 먹을 생각으로 횟감용 생굴을 넉넉히 사서, 기왕이면 애들도 먹이려고 오일 파스타를 만들며 굴을 넣었을 뿐인데, 그게 문제가 되었을 줄. (추정일 뿐이지만 거의 확실하다.) 맛있는 떡국 국물을 먹으려고 굴을 듬뿍 샀는데 그 굴 때문에 둘째 빼고 남편과 나, 큰 아이가 한 바탕 앓았다. 그나마 다행으로 노로 바이러스 치고는 가벼웠다는 것, 수액이나 입원치료 없이 하루, 이틀 만에 회복이 되었다는 걸 감사해야 할까. 정말 싱싱한 이게 횟감용 생굴을 그래도 익혀 먹어서 살짝 지나간 것일까. 그런데 이상하다. 남편이 제일 먼저 증상을 보였고, 하루 반 뒤에 내가, 하루 뒤에 첫째가 증상이 나왔다. 증상도 다 다르게 말이다. 설사, 고열, 구토. 그게 한 사람에게 한꺼번에 오기도 한다는데 사이좋게 나눠서 왔나 보다. 이쯤 되면 그냥 액땜이라고 쳐도 될는지. 같이 먹었는데 장염에 안 걸린 둘째의 면역력을 칭찬해야 하나, 아님 나머지 세 식구의 극도로 떨어진 면역력을 걱정해야 할까. 여하튼, 2023년은 그렇게 맞았다. 노로 바이러스와.


https://brunch.co.kr/@niedlich-na/119


내가 산 식재료로, 내가 한 요리로 인하여 식구들이 아프니 나도 아픈데도 마음이 안 좋았다. 노로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질 않으니 내가 보이는 바이러스 감염 굴을 알고 산 것도 아닌 데도 미안한 마음이 컸다. 이게 부엌칼을 쥐고 사는 장수의 무게인가 보다. 피할 수 없는 패배에도 뼈 아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장수의 고뇌. 이젠 다신 굴을 먹지 못할 것 같다. 작년에 굴 먹고 탈 났을 땐 내가 한 요리가 아니고 시댁에서 받은 굴무침이 원인이어서 몸은 아팠어도 마음이 쓰리진 않았는데 이번엔 사뭇 다르다. 작년에 어머님 마음이 이러셨을까. 각 집의 부엌칼 장수들은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나 보다. 잊지 않으리. 앞으로 굴을 먹지 않겠노라. 땅땅땅.  망각의 축복은 개 뿔.


https://brunch.co.kr/@niedlich-na/99


새해맞이로 아이들과 만두를 빚으며 엄마는 나이를 한 살 더 안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했는데 떡국을 못 먹고 한 살을 더 못 먹었다면 말 대로 되었는지도 모른다. 큰 아이는 다행히 떡국을 먹고 난 오후부터 증상이 나와 무사히? 한 살을 더 먹을 수 있었다. 그놈의 한 살. 이렇게 오만 행사를 치르며 먹은 한 살이 6월부터 만 나이로 계산되어 깎이게 된 다는 걸 아이들이게 설명해야 할까? 2023년부터 바뀌는 것들 중 가장 큰 뉴스 중에 하나가 만 나이 정착인데 이렇게 손에 꼽으며 힘들게 한 살을 더 먹은 아이들에게 너 사실 한 살 깎아야 한다고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여하튼, 새해가 밝았다. 2022년의 결산, 2023년을 맞이하는 마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프다가 아픈 아이 살피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1월 하고도 2일 밤이다. 아이들의 겨울방학 중이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노로 바이러스는 전염성도 강하다 하여 방학이 아니었으면 혹시 모르고 등원을 하여 다른 아이에게 옮길 수도 있었을 일을 우리 집 안에서 피운 소동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비교적 가벼운 증상으로 하루, 이틀 만에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둘째까지 모두 아팠으면 난 정말 멘붕이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열이 갑자기 39.5도까지 오르며 핸드폰을 쥐지 못할 정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몸이 뻣뻣해지며 떨리기만 하니 나는 마비가 오는 건 아닌가 겁이 나기도 했는데 다행히 지난번에 사 둔 타이레놀과 부루펜 계열의 해열 진통제가 모두 있어서 교차복용을 하고 열이 금방 내려 다행이다. 남편이 그나마 병원이 여는 시간에 증상이 나와서 약을 타다 놓아 어른 두 명은 주말 동안 그 약으로 버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2023년의 키워드를 다행이다로 삼고 시작하려 한다. <다행이다>의 연관 검색어를 <감사하다>로 정하려 한다. 올 한 해, 이런저런 어두운 전망들이 많다. 경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신문을 봐도 우울한 기사들 뿐, 개인적으로도 아이가 입학을 하니 기쁜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나의 시간과 노력을 많이 할애해야 할 것 같아 솔직히 마음이 조금 무겁다. 여기에 <다행이다>와 <감사하다>를 끼워 넣어본다. 그래도 우리 부부가 건강하고, 아이들이 즐겁게 자라고 있고, 나의 시간과 노력이 들겠지만, 내 새끼 내가 돌볼 수 있음이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네 식구의 요상한 떡국 한 상.


우리 조상님들도 같은 생각을 하셨나 보다. 확실한 미래를 덕담으로 주고받으셨단다. 가끔 미리 감사기도를 드릴 때가 있다. 감사 기도를 받으셨으니 그 기도를 들어주실 수밖에 없을까 하는 간절 한 마음이 들 때 주로 그렇게 한다. 잊고 있었는데, 노로 바이러스 소동을 겪으며 건강과 무사, 안녕을 미리 다행으로, 감사로 삼고 시작하는 한 해가 되어 다행이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신다니 감축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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