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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Jan 10. 2023

샘 나서 공부하는 아이.

둘째 이야기. 

 

둘째가 여섯 살이 되었다. 11월까지 만 4세로 네 살일 예정이지만 꼬박꼬박 자신이 여섯 살이 되었음을, 이제 한 손으로 나이가 모자라 한 손가락을 더 보태야 하는 여섯 살이 되었음을 누구보다 기뻐하는 아이, 우리 둘째는 목소리도 크고, 성격도 호탕하고, 융통성도 있으며 애교도 많고, 공부는 하기 싫지만, 형아 혼자만 엄마 옆에 붙어서 뭘 하는 것이 샘이 나서 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이다. 작년까지는 색연필 잡고 그림이나 그렸으면 싶었는데 자기도 공부할 거리를 달라고 하여 자음과 모음을 배웠다. 학습에 대한 열의가 아니라, 샘이 나서, 자기만 안 하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 한 공부이다. 공부는 싫은데, 하기는 해야 하는 그 복잡한 마음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여하튼 둘째는 기본 자음의 모양은 쓸 줄 알게 되었고, 모음은 아직 헷갈리는 모양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유년기까지는 시지각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아 미러링이라고 하는, 글씨나 그림을 거꾸로 그리고 쓰는 것이 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첫째가 한글을 배울 때, ㄹ 을 거꾸로 S처럼 쓰거나 ㄱ ㄴ ㄷ 도 정확하게 거꾸로 된 방향으로 써서 당황하였더니 그것이 아이의 시각을 뇌에서 처리하여 손으로 보내는 그 과정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정상적인 과정이라 듣고는 안심했던 기억이다. 자음 보다 모음을 더 어려워하였다.ㅏ 를 써 놓고도 이리 보면 ㅏ, 저리 보면 ㅓ 옆에서 보면 ㅗ , 뒤에서 보면 ㅜ 가 되니 그리고 모음은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서 자음 옆에 쓰는 것이 있고, 밑에 쓰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그래서 둘째는, 생일도 늦은 이제 여섯 살 된 아이에게 한글 공부를 굳이 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형아만 엄마 옆에 붙어서 뭔가를 하는 것이 샘이 나고, 형아는 형아대로 자기는 여섯 살 때부터 공부를 하였는데 (스티커 붙이는 한글 워크북이었다 이놈아) 동생은 안 시킨다고 샘을 내어 둘째도 한글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엔 형아 공부하는 동안 그냥 자음 모음을 옆에서 쓰게 하였고 이번 겨울 방학부터는 내친김에 자음과 모음의 결함도 한 번 해 볼까 하고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나는 한글을 가르치는 법을 모른다. 그냥 한국 사람이고, 영어 학원에서 파닉스를 가르쳤을 뿐. 일단 아이에게 더하기를 하겠다고 하니, 자기가 아는 것을 더하려고 한다. ㄱ 하고 ㄹ 을 더하면? ㄱ 하고 ㅋ 을 더하면? 하고 말이다. 색연필을 집어 들고 자음 옆에 쓰면서 말한다. 이제부터 그냥 기역 아니고 그그 기역이야. 그그 하고 아 하고 더할 거야. 그 아 그 아 그 아 그아그아그아 가!!!! 이렇게 열 손가락에 꼽으며 열 번째 손가락에서 가! 하고 소리치자고 누가 큰 소리로 하나 보자 하고 아이를 도발하였더니 열심이다. 그다음에는 그 하고 오 하고 합쳐보자, 그 오 그오 그오그오그오 고!!!! 해야 하는데 가!! 그러는 아이. 어라? 다시! 그오그오그오 고!!! 둘째의 한글 공부도 형아와 마찬가지로 십분 이내이다. 너는 아직 안 해도 되는데, 사실 내가 좀 귀찮은데 다섯 살 때부터 형아한테서 너도 여섯 살 되면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하도 들어 세뇌 당한건지 꼭 공부는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드나 보다. 하기도 싫지만 안 하기도 싫은 공부라니. 아이는 샘이 많아 공부한다. 엄마를 형아만 독차지하는 것이 그렇게 눈꼴시려 못 봐줄 일이니. 



 우리 아이들은 그림책만 읽어 줘도 스스로 알아서 한글을 깨 치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아이들은 아니다. 첫째의 한글공부도 네다섯 살에 스티커 붙이는 홈스쿨 워크북을 던져주었는데 스티커만 붙이고 전혀 한글의 로직을 깨치치 못했었다. 파리를 꿀벌로, 가지를 김밥으로 읽는 것을 보고 그림 하나 없는 깍두기공책으로 한글 공부를 시작한 것이 엄마표 공부의 시작이었다. 한글은 한자처럼 모양을 외워야 하는 글자가 아니고 표음문자, 소리 나는 대로 읽고 쓰기에 최적화된 세계 최고의 문자 체계인데 그것을 그림을 보여주며 통글자로 눈에 익히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 이년 늦게 글을 깨치면 어때서, 글을 늦게 깨치는 그 기간 동안 아이들은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즐기며 저마다의 속도대로 자랄 텐데 왜 굳이 한글을 네다섯 살에 깨치게 하려고 한글을 통글자로 인식하게 하는 말도 안 되는 우를 범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 또한 첫째가 네 살 때 스티커 한글 책을 사 준 일에 대해 후회와 반성, 그 중간 어딘가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스티커를 떼고 붙이는 것도 아이에겐 경험이고 공부였을 테니 그것을 후회하고 반성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책을 사 주었다고 그림을 보며 한글을 저절로 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내가 조금 잘 못 생각한 부분이고 파리를 꿀벌로 말했다고, 가지를 김밥이라 했다고 아이 앞에서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왜 그렇게 읽냐고 다그친 것은 내가 확실히 잘 못 한 부분이다. 


 그래서 둘째의 한글 공부는 천천히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놈이 샘을 부려 엄마 무릎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아그아그아그아가!를 울부짖으며, 그오그오그오그오 가! 라며 말이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한 번 쭉 훑고나서 다시 기역으로 가니 훨씬 낫다. 그우그우그우그우 가! 하고 멀쩡한 표정을 지으면 정말 모르는 것인데, 눈에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엄마가 어쩌나 보자 하고 있으면 알면서 장난을 친 것이다. 그렇게 십 분간 내 무릎에 앉아 소리를 냅다 지르다가 공부가 끝났다고 하면 신나게 박차고 일어난다. 웃긴 녀석이다. 공부 하긴 싫지만, 안 하기도 싫은 녀석. 그러는 옆에서 형아가 말한다. 엄청 모범생스러운 어투로, 쟤는 말은 엄청 잘하는데 왜 글을 못 읽어?라고 말이다. 


너는 더 했어,라고 속으로 말하고 아직 아기잖아.라고 겉으로 말했다. 둘째의 한글 떼기를 생각하니 막막하기보다는 좀 귀찮다. 나 둘째 정말 예뻐하는데, 둘째에겐 뭐가 왜 이리 귀찮은지 모르겠다. 


엄마표 공부엔 첫째 이야기가 주로 많지만, 제가 둘째도 있답니다. 엄청 예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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