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길동 씨는 불쌍하지 않고, 위대하다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 리뷰 제3장-1

by 멋쟁이 한제

아이들과 함께 유튜브로 둘리를 본다. 큰 아이가 어디서 보았는지, 들었는지 둘리 이야기를 해서 유튜브를 찾아보니 1화부터 26화까지 볼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80년대 둘리와는 색감도 목소리도 표정도 집안의 가전 가구들도 조금씩 달라진 둘리이지만 둘리는 역시 둘리, 나도 재밌고 아이들도 깔깔 웃으며 본다. 이런 걸 고전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구관이 명관이라고 해야 하나, 3D, 4D까지 나오는 화려한 최신 애니메이션도 좋지만 이런 옛날 만화를 깔깔 대고 보는 것, 둘리 일당의 작당모의, 우당탕탕 에피소드 같지만 소박하고 따뜻하지만 철학적이고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같이 봐도 재밌다.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희동이가 그 집 막내 아기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고길동 씨의 조카였다. 희동이의 엄마 아빠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며 희동이를 고모부 집에 맡겼다고 하니, 이건 내가 유학을 가며 시누이 집에 아기를 맡기는 건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래서 어른이 되어 보는 만화는 만화에 푹 빠질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내가 시누이 집에 애를 맡기는 상상은 왜 하는 거야?



이진민 작가의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이라는 책, 3장에는 가치 다원주의라는 말이 등장한다.

<다원주의는 상충하는 가치들 중에는 근본적으로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모든 가치를 그저 동등하게 보는 것이 상대주의라면, 그 동등한 가치들이 고루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다원주의이다. – 인용>


둘리네 집 아니 고길동 씨의 집의 에피소드를 보며 이 다원주의라는 말이 떠올랐다. 엄마 떨어진 둘리와 희동이, 지구에 어쩌다 불시착 한 외계인 도우너, 서커스 단에서 탈출한 또치, 노래를 못 하는 마이콜, 각각의 캐릭터는 결핍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이를 서로 보듬으며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살아나간다. 다원주의의 밑줄은 존중에 그어진다는데, 고길동 씨는 언뜻 보면 우당탕탕 캐릭터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내 집에 이것들을 그냥 살게 해 둔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존중이고 수도(修道)이며 진정한 어른이고 가장이었음을 내가 마흔이 되어서야 이해한다. 고길동 씨는 불쌍한 것이 아니라 (불쌍하긴 하지만) 대단히 이타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가장이다. 존경해 마지않는다. 내 새끼 둘도 허덕이며 돌보는데 온갖 희한한 생명체들까지 집안에서 끌이고 살다니. 아이들과 함께 둘리를 보며 고길동 씨가 불쌍하면 어른이 된 것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내 집에 벌어지고 있는데 싫다면서도 받아주고, 구박하면서도 키워주니 정말 복 받으실 분이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80년대 작품임을 감안하면, 아마 지금 내 나이? 아니면 내 나이보다도 어릴지 모른다. 그 시절은 결혼과 출산은 지금보다 훨씬 빨랐을 때이니.


그런데 둘리를 가만히 보면 둘리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내 안에, 내 아이들 안에, 내 남편 안에 조금씩 나뉘어 담겨 있음이 보인다. 엄마랑 있어도 있어도 엄마가 좋다는 우리 둘째, 잠깐 쓰레기 버리러 혼자 두는 것도 이렇게 서럽고 무서워하는데 1억 년 전에 엄마 떨어진 둘리는 도대체 얼마나 서럽고 엄마가 그리울까. 엄청난 초능력을 가졌지만 엄마를 그리며 슬퍼하는 모습에선 초능력이 1도 쓸모가 없다. 아기 희동이가 늘 물고 있는 쪽쪽이도 눈에 보인다. 우리 아이들은 아기 때에 불안할 때, 무서워 울 때, 졸릴 때에 쪽쪽이를 물었는데 희동이는 항상 물고 있다. 저 아기는 언제나 불안한 것이 아닐까. (가장 전형적인 아기를 상징하는 쪽쪽이란 소품에도 이렇게 눈길이 가는 나는 아기 키운 엄마이다). 엄마로, 아빠로 산 지 벌써 8년 차이지만 나와 나의 남편은 언제나 초보이고 여긴 어디, 난 누구, 내가 어쩌다 애들 둘을 키우고 있지, 하는 생각을 한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내가 어쩌다 이런 곳에, 아마 도우너가 이런 마음일 것이다. 내가 살던 별과는 너무도 다른 지구라는 곳, 나 역시 내가 살던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육아라는 별에 살고 있으니. 가끔은 그 깐따삐야 별이 너무도 그립다.


재주 조금 있다고 허세를 부리며 약간 공주병 끼도 보이지만 사실 무력이나 초능력 같이 대단한 능력은 없는 또치의 모습은 언뜻 나와 비슷하고 착하긴 한데 잘하는 것, 되는 일이 없는 마이콜의 모습에선 어쩐지 남편이 보이기도 한다.


조금 더 확대해 보면 둘리네 집은 우리 사회와 같기도 하다. 고길동 씨처럼 완전한 (그는 불청객들을 거둬 먹여주고 키워줄 만큼 인성도 완벽하고 자가에 자차, 안정적인 직업도 있을 만큼 능력도 좋다) 사람도 있고 철수와 영희처럼 구김 없이 밝은 사람도, 둘리처럼 엄마 떨어져 크는 아이, 희동이처럼 돌봄이 필요한 아이, 이 별은 나의 별이 아니라는 도우너 같은 적응이 힘든 사람, 다소 허세와 허영이 있지만 그런대로 귀여운 또치 같은 사람들, 재능과 적성, 능력에 노오오오력을 강요받는 사회가 당황스러운 마이콜 같은 평범한 꿈 꾸는 청년들. 이런 사회가 내가 살아가는 사회이며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이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 아기 공룡 둘리를 아이들과 다시 보니 감회가 너무 새롭다. 이건 만화가 아니라 철학이었어!


고길동 씨의 가정엔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우리 집안의 일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장으로서 그 어떤 에피소드에도 묵묵히 일하고 화나는 일 있어도 그래도 밥 주고 품어주는 고길동 씨는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리더인지도 모른다. 나는 고길동 씨를 불쌍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존경해 가고 있으니 내 나이는 더 들어가는 것일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금 보는 2000년대에 리터치 된 아기공룡 둘리에서도 철수 영희의 엄마, 고길동 씨의 아내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여보 손님 왔어요.라고 말하며 손님 상을 차려내고, 식구들 밥을 차려 주는 엄마. 집안일을 소리 없이 말끔히 완벽하게 해 내는 엄마의 모습 말고는 엄마를 나타내는 캐릭터가 별로 없다. 80년대에 나온 버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최근에 나온 버전에서는 고길동 씨의 아내의 모습도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러듯 아이들에게 소락대기, 등짝을 날리는 현실 엄마라든지 아니면 고길동 씨처럼 출근하고 일하는 엄마의 모습이라던지, 가정에서의 엄마의 모습은 정말 다양해졌는데 아직 옛 버전에 갇혀 있는 듯한 고길동 씨의 아내 박정자 씨 (인터넷에서 찾아봤다)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둘리를 마흔에 다시 보게 될 줄 몰랐다. 옛날엔 그때그때 티브이에서 할 때 만 볼 수 있어서 이렇게 정주행 하지 못 했었는데 아이들과 한 회, 한 회 보다 보니 몰랐던 모습이 새로 보인다. 나는 둘리를 보던 미취학 아동에서 취학 아동을 키우는 애 엄마로 역변하였고, 둘리는 색감이 달라지고 목소리가 조금 변한 리터치에 그쳤다. 나와 둘리의 변화의 격차만큼 세월이 지났다. 아이들은 어떤 시선으로 둘리를 볼까. 나중에 둘리에 나오는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몰라, 깜빡했어를 시전 할 무뚝뚝한 아들이지만 엄마는 고길동 씨를 더 이해하게 되었음을, 철수, 영희의 엄마도 집에만 있지 않고 회사에 다니고, 모임에 나갈 수 있는 사람임을 얘기해 주고 싶다.


이전 07화그림책에서 떠올린 소금 사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