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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Jun 20. 2023

냉장고와 옷장의 공통점

뭐가 가득한데 막상....... 

 냉장고가 가득 찼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요 며칠 계속 그런 상태였다. 코로나 걸렸다고 여기저기서 공수받은 반찬들에, 아프고 힘들고 귀찮아서 사 먹고 시켜 먹고 남은 것들, 반찬통에 오밀조밀 모여 이것저것이 가득 들어있는 냉장고인데 막상 먹을 것이 없었다. 이런 마법과 같은 일은 사실 냉장고뿐만은 아니다. 


 옷장도 그렇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인 이후 몸무게 변화가 거의 없어서 이런저런 옷들이 많다. 몸에는 들어가지만 유행이 지난 것도 있고, 사이즈는 맞지만 더 이상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young 한 스타일의 옷들도 있다. 세트로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지고 한 짝만 남은 것들,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불편해진 짧은 치마들, 그렇게 옷장에 뭐가 많은데 막상 입을 것이 없다. 이것 역시 마법이다. 


어제까지는 대충 때웠다. 사 먹고, 있는 것 데워 먹고, 냉동식품 돌려 먹고, 계란밥 해 먹고, 편의점에서 컵라면도 사 먹고 왔는데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오늘부터는 움직여야 했다. 일단 내가 먹어 치울 수 있는 것들을 먹어 없앴다. 그릇과 자리를 확보해야 했다. 그렇게 먹어 치우는 행위를 스스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아이의 생일에 먹고 남은 케이크와 자리 차지 하고 있는 수박, 먹고 남은 치킨을 먹어 그릇과 일단 자리를 확보했다.


 장도 조금 봐 왔다. 양념육은 잘 안 사는 편인데 트레이더스에 돼지 꽃살 양념육이 지난번에 먹어보고는 맛있어서 다시 사 왔다. 두 번 먹을 양으로 나누어 하나는 냉장고에, 하나는 냉동실로 넣었다. 냉동실이 한동안 음식들로 그득했는데 어느새 할랑해졌다. 냉동실이 그득하면 든든하면서도 저걸 다 먹어야 한다는 숙제를 받은 느낌이 있고, 할랑해지면 마음도 가벼워서 좋지만 막상 먹을 것이 없을 까봐 불안하기도 하다. 냉동 만두도 한 봉지 사 왔다. 냉동 만두는 계획에 없던 품목인데 행사 진행하시는 직원분께서 영업을 어찌나 잘하시는지 홀린 듯이 한 봉지를 사 와 냉동실로 들어갔다. 충동구매였지만 맛있는 만두였으니 조만간 한 끼 해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계란도 두 판을 들고 오는 바람에 냉장고에 남은 채소들을 털어 달걀 열개로 달걀말이도 두툼하게 말고, 다섯 개를 더 꺼내어 삶아서 달걀 샐러드를 만들었다. 채소를 다지는 김에 넉넉히 다져 소고기 다짐육과 함께 소고기 야채죽을 잔뜩 쑤었다. 오랜만에 압력솥으로 죽을 쑤니 하루 이틀 건너 이유식을 만들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이유식 죽이 맛이 없었다. 하도 자주 보니 지겨워서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먹는 죽들은 종류별로 모두가 다 맛있다.  코로나 걸린 동안 죽을 한 번 사 먹었는데 그냥 내가 쑤는 것이 더 낫다. 양도 푸짐하게 해서 냉동실에 쟁여 아이들 아침으로 몇 번 줄 수도 있고, 맛도 나름 괜찮다. 이유식부터 죽 쒀온 내공이 상당한 모양이다. 



 대충 냉장고를 손 보고 나니 하루가 후딱이다. 하루 종일 뭔가 바쁘게 움직였는데 저녁 식단을 보니 카레에, 계란말이, 크래미, 귤하나, 평범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식단이다. 집안일은 해도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티 난다는 말이 여기서 실감이 난다. 냉장고가 그렇게 깨끗해지거나, 차곡차곡 먹을 것이 생긴 것도 아닌데, 하루 종일 바빴던 것이 억울할 정도이다. 이 정도면 이것 역시 마법이라 할 수 있을까. 


 조만간 옷장도 손을 보려 한다. 일 년 동안 입지 않은 옷은 정리해야 한다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일 년에 한 번은 아니어도 2년에 한 번은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옷들이 쌓이고 쌓여 정체 모를 옷장이 되어 있다. 매일매일 물 튀고 음식 튀니 갈아입어야 하는 데일리 티셔츠에, 어쩌다 입게 되는 예쁜 옷들과 요즘엔 학원에 알바를 하러 나가니 그때 입을 약간 포멀 한 옷들까지 도대체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냉장고 속 너부러진 반찬들처럼 내가 먹어 치울 수도 없고 참 애매하다. 


 뭐가 많은데 먹을 것이 없는 냉장고, 뭐가 많은데 입을 것이 마땅찮은 옷장 뭔가 서글펐다. 나의 집, 나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 냉장고와 옷장을 바라보며 나를 돌아본다. 게으른 성격 탓일까, 정리 정돈엔 영 소질이 없는 천성 탓일까, 네 식구의 衣와 食이 오롯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이 오늘은 왠지 억울했다. 나 하나 살기에 최적화된 몸과 머리로 4인분을 살려니 버퍼링이 온 것이라고 위로해 본다. 


 오늘의 냉장고 정리는 임시방편으로 일단 조금 진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힘들었고, 하지만 그거 했다고 조금 든든하다. 내 옷장도, 아이들, 남편 옷장도 조만간 한번 임시방편으로라도, 조금이라도 뒤집어 봐야겠다. 그나저나 살림이 며칠 밀렸더니 방학숙제 밀린 것처럼 압박이 크다. 이래서 숙제는 밀리지 않아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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