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다니는 여자

번외 편. 여행 와서 새삼 느낀 감정

by 멋쟁이 한제

나의 여행짐은 비교적, 여자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단출하다. 일단 스킨케어 제품은 기초와 색조 포함 여름이라 온 가족용 선크림 하나와 어성초 패드 하나, 바셀린이 끝이다. 바셀린은 사계절 입술이 트는 나와 아이들을 위한 립밤이자 핸드크림도 되었다가, 풋크림도 되었다가 하는 팔방미인.

이번 휴가는 그나마도 흐린 날씨로 선크림은 개시도 안 했다. 여름이라 아이들은 샤워 후 아무 로션도 바르지 않고 나도 스킨적신 패드로 쓱쓱 문지르는 게 끝이다. 조금 당길 때도 있지만 습도에 더위에 금방 괜찮아진다.

샤워용품은 더 간단하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샴푸와 바디로션을 쓰고 얼굴 씻을 세안제만 애들 약병에 덜어왔다. 양치용품은 꼼꼼한 신랑이 아이들 치실까지 챙긴다.

워터파크에 가서 절실히 알았다. 내가 얼마나 대충 씻는지를. 다들 헤어 용품, 바디용품, 스킨케어와 기초 색조 고데기까지 챙겨 와 꼼꼼하게 챙기는데 나는 달랑 수건 한 장 챙겨 들어가 샤워장에 구비된 바디 샴푸겸용 세제로 대충 머리를 감고 몸을 헹군 뒤 샤워를 마쳤다. 드라이도 귀찮아 대충 털고 옷을 갈아입었고, 깜빡하고 얼굴에 바를 스킨도 안 갖고 와서 구비된 스킨로션이 있나 봤는데 없어서 그냥 나왔다.

어차피 땀이 다시 날 것 같고 숙소에 가서 다시 씻으면 되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달랑 비닐봉지 하나로 샤워를 마치고 적나라한 생얼로 밖으로 나가는 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다.




일정이나 맛집 검색도 잘하지 않는다. 일단 소문난 맛집엔 굳이 줄 서며까지 가보고 싶지 않은 삐딱선이 있는 데다 위가 작아 많이 먹지도 못하는 반면, 배고픈 건 또 못 참고, 아무거나 다 맛있는, 맛의 허용범위가 매우 넓어 여행할 땐 돌아다니다 배고플 때 눈에 띄는 식당에 가는 편이다. 대부분 맛있다. 아이들이 있으니 안 매운 식당 위주로 찾아가는데 칼국수 육수나 우동 육수가 매콤할 땐 좀 미안하고 난감하다. 분명히 맵나요? 물어도 안 매워요 하시는데 아이들 입맛이 어른이랑은 다르니, 유난히 매운맛에 취약한 우리 애들이 별난 걸 어쩌누.

매워서 못 먹은 국수
떡볶이와 미역국


여행의 절반이상을 식도락으로 여길 분들에겐 정말 재미없는 이야기 일 수 있겠다. 이번 여행 와서도 김밥과 비빔국수, 소시지, 핫도그, 어묵, 떡볶이, 맥너겟 그나마 특식으로 먹은 것이 오징어무침과 미역국정찬이다. 기장에서 먹는 기장 미역국은 정말 맛있었다. 미역국은 내가 끓여도 기본 맛은 하지만 전문점 미역국은 확실히 달랐다.

바닷가 와서 회도 안 먹었어? 하겠지만 크게 뭐 상관없다. 회야 집 앞에서도 먹는 건데 뭐.

이렇게 아무 식당이나 가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언젠가 여수에서 이렇게 지나가다 들린 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맛있게 백반 한 끼를 먹고는 다음에 여수 오면 또 오자 했었는데 나중에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나오는 바람에 웨이팅 맛집이 되어버려 다시 가기 힘들어진 곳도 있다.

이번 부산에서 시장에서 먹은 오징어무침맛이 특이해서 다른 식당에서 한번 더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식초 맛이 적고 간장의 짠맛이 평소 먹던 오징어무침보다 강한,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인데 손이 가요 손이 가던 맛. 그게 부산식인지 그 집 할매 손 맛인지가 궁금하다. 돼지 두루치기도 왠지 부산만의 맛이 있을 것 같아 우연히 들리게 될 식당에 메뉴로 있으면 먹어보고 싶다.

생각처럼 될지는 모르겠다. 길거리에 보이는 떡볶이에 눈이 뒤집혀 사 먹을지, 아이들이 짜장면이나 돈가스를 찾을지, 속이 불편해서 죽집에 가게 될 수도 있고 체해서 굶어야 할 수도 있다.


백종원의 푸드기행 보는 것을 좋아한다. 스트리트 푸드여행이나 시장의 숨겨진 맛집을 찾아 먹는 것이 나랑 뭔가 코드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음식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만 틀에 갇히지 않으신 분 같아 티브이로 만나는 재미가 크다. 다른 음식 전문가들은 교과서 같은 틀이 느껴지는데 백종원의 음식여행은 그런 느낌 없이 편안해서, 어디 가면 꼭 뭘 먹어야 한다는 것에 그저그런 삐딱선을 타고 있는 나도 아, 저기 가선 저걸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스로 들기도 한다.

여행 가서 뭐 맛있는 거 먹고 있냐는 친구의 안부에 평소와 비슷하게 먹는 것 같다는 답을 보내며 서로 웃었다.

부산까지 와서 회도 한 접시 안 먹는걸 나답다 해주는 친구, 나를 닮은 여행가방, 이런 나를 있는 대로 받아주는 우리 가족들.

이렇게 대충 사는 여자라니, 그래서 무던한 남자 셋을 가족으로 주셨나 보다, 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마음 오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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