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윽스윽스윽스윽, 탁탁탁탁탁탁 하는 일정한 도마 소리에 잠을 깨던 시절이 있었다. 도마소리에 잠을 깼다는 건, 그게 내가 낸 소리가 아니라는 것. 결혼 하기 전 엄마의 밥을 먹고 살 때이다.
아침에 그런 도마 소리가 나는 날은 엄마가 무나물을 만드는 날이었다. 한국사람이라면 다 아는 무나물이지만, 우리집 무나물은 조금 다르다. 돼지고기와 고춧가루를 넣어 매콤하게 만들어 밥 위에 얹어 비벼 먹는 일품요리이다. 아빠의 엄마, 즉 나의 친할머니가 해 주시던 반찬이라 했다. 여름에 무도 맛이 없고 입맛도 없을 때 그렇게 남는 고기를 넣어 기름기가 돌게 하고 고춧가루로 매콤함을 돋우면 맛있게 밥 한 공기 먹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빨간 무나물이 우리 엄마에게 전해진 듯하다.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무나물 볶는 것에 채 썬 돼지고기, 주로 구워 먹고 남은 삼겹살 아니면 기름기가 있는 뒷다리살을 넣고, 새우젓으로 맛을 내고 고춧가루로 색을 낸다. 들깨 가루, 청양고추, 파, 마늘은 알아서 적당히 입맛에 맞추어 넣으면 끝. 그러면 아빠가 생각나는 빨간 무나물이 완성된다.
1997년,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
햇볕이 쨍해 밖은 밝은데 집 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하던 어느 낮의 친정, 주방에선 이 빨간 무나물이 냄비에 가득 담겨 있었고 아빠는 여느 때 처럼 목 늘어난 난닝구를 입으시고는, 항상 쓰시는 파란색 술컵에 (술잔 아니고 술 컵)술을 한 잔 따라 술이 반주인지, 무나물 비빔밥이 안주인지 누가 주인공인지 모를 식사를 하시곤 했다.옆에는 엄마가 앉아 있고 바닥에는 키우던 하얀 강아지 설구가 돌아다닌다. 그 빨갛고 파랗고 하얀 광경이 흑백 사진으로 내 마음속에 담겨 있다가 오늘처럼 무나물을 (이제는 만들어) 먹는 날이면 그 흑백의 정지 화면이 컬러 동영상으로 서서히 되 살아 난다.
너 이름이 뭐야????????????
무나물을 만들려고 무를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다. 무나물 한 냄비를 만들고 남은 무로는 소고기 뭇국을 끓일 작정이었는데 너무 날씬한 무가 와서 무나물만 만들게 되었다.
나는 채칼을 쓴다. 신혼 때 무를 그냥 썰다가 칼이 무 중간에 박혀서 오도가도 안 되는 채로 동동거렸던 일 이후로, 무는 무조건 채칼로 썬다. 우리집 채칼은 가는 채칼이라 무나물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냥 쓴다. 굵은 채칼을 또 사기는 그렇다. 팬에 파, 마늘을 넣고 볶다가 무를 넣고 고기를 넣고 익히면서 새우젓을 다졌다. 한 숟갈 그냥 넣어도 되는데 새우젓의 꺼끌한 면이 혹시라도 큰 아이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 길로 무나물은 저 멀리에, 밥은 김을 싸서 먹어야 하니, 최대한 심기를 건들지 않도록 탕탕 쳐서 다졌다. 다시마 물이 있어서 조금 넣었고, 들깨 가루가 있어서 조금 넣었다. 그리고는 그릇에 반 정도 덜어 놓고 팬에 남은 무나물에는 고춧가루를 넣어 색이 나도록 한소끔 더 끓였다. 입맛이 순해져서 맵지 않은 고춧가루를 쓴다. 고춧가루가 얼추 불며 빨간 빛이 예쁘게 돌 때 불을 껐다. 하얀 건 애들 거, 빨간 건 어른 거.
하얀 무나물, 빨간 무나물
무는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고, 돼지고기와 새우젓은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니 이 무나물 반찬은 여러가지로 건강에 좋은 반찬 일거라 생각한다. 아이들도 잘 먹는다. 한 그릇 음식으로도 손색없지만 오늘은 냉장고에 남은 미트볼과 단호박, 토마토를 더해 반찬까지 놓아 주었다. 나는 어릴 때 고기만 골라 먹었는데 무나물도 잘 먹는 아이들이 예쁘다. 신랑도 잘 먹는다. 결혼하고 처음 접해 본 음식 이랬는데 어느새 익숙해져서 무나물 한다고 하면 으레 이렇게 해 주는 줄 알고 있다. 내심 더 짭짤하고 더 매콤했으면 하는 눈치다. (자네 아내가 위장이 좋지않아 더 이상은 불가하네)
쌍팔년도 인듯 하다.
아빠는 내가 만든 무나물을 한 번도 드시지 못 하였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해드릴 수도 없지만, 평생 식당밥도, 남의 집밥도 마다 하시며 엄마 밥 (본인 엄마와 나의 엄마)만 드신 아빠는 내가 만든 무나물은 무나물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채칼로 썰어 실처럼 가느다란 무나물이라니. 비주얼부터 불합격!! 아니면 막내 딸이 해 준거라 맛 없어도 맛있게 그러나 맛없게 드셨을까.
아빠의 기일이 돌아오고 있다. 추석을 준비하고, 산소에 찾아갈 일정을 맞추며 아빠 생각이 문득 더 나는 하루였다. 빨간 무나물 밥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