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라탕과 탕후루 열품으로 청소년들 먹거리에 빨간불이 켜진 듯하다. 매운맛과 단맛은 마치 올림픽 신기록을 갱신하듯 더 매워지고 더 달아진다. 단지 마라탕, 탕후루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더 강하다는 뜻의 '레드', '핵'이라는 접두사가 붙여 계속 새로 출시되는 라면들, 한동안 유행이었던 '뚱카롱'과 달고나, 크림과 시럽이 잔뜩 들어간 음료만 봐도 그렇다.
내가 청소년일 때 먹었던 음식들에 비하면 음식이 강렬함으로 진화해 튼튼하게 무장한 느낌인데,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먹을 음식이 더 강렬하게 진화할 것을 상상하면 아찔해진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자란 나도 마흔이 넘으니 몸 속의 장기들이 삐걱거리는데, 그렇게 센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들의 20대와 30대는 건강할 수 있을까. 그 자극적인 음식을 소화시키느라 기진맥진하여 일찍 노화가 시작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바나나였다. 원래 여름 한철에는 우리 집에서 바나나를 찾아보기 힘들다. 끝없이 모여드는 날파리 탓에 바나나를 잘 사지 않는다. 어쩌다 한 송이 사는 여름날이면 한두 개씩 먹고, 나머지는 모두 까서 갈아서 얼려 아이스크림으로 먹는다.
그것도 귀찮다 보니 여름이면 아예 바나나는 피한다. 날이 선선해지고, 날파리들이 자취를 감춘 요즘 우리 집에 바나나가 돌아왔다. 바나나를 걸어두는 원숭이 꼬리에 수시로 바나나가 한 송이씩 걸린다.
한동안은 바나나를 멀리했다. 아니 바나나가 너무 싫어졌었다. 아기를 낳고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부터이다. 아기가 가장 먼저 먹을 수 있는 음식 중에 하나가 바나나이다 보니 바나나를 으깨서 이유식 대용으로, 간식으로, 분유 말고 먹는 고형식으로 자주 먹였다.
아기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맛보는 단맛의 황홀경에 빠져 바나나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조그만 아기가 먹는 양은 많아야 하루에 반 개, 그마저도 입이 짧은 아기는 자주 주면 먹질 않았으니... 바나나 한 송이는 오로지 내가 먹어야 하는 몫이 되곤 했다.
그러기를 며칠째, 언젠가 바나나 먹기가 너무 지겨워서 바나나를 사지 않았다. 그러나 아기는 산책을 나갈 때, 외출을 나가서 바나나가 눈에 띌 때마다 바나나를 가리키며 강렬하게 요청했다. 그렇게 한송이 들여오면 또 반 개만 맛있게 먹고는 나머지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때 내게 바나나는 있으면 부담이고 없으면 아쉬운, 그래서 몇 년간 바나나는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그야말로 계륵이었다.
그러던 바나나가 다시 우리 집 든든한 비상식량으로 자리 잡았다. 아이들이 자라며 먹는 양이 늘다 보니 이젠 한송이를 사도 얼추 다 먹게 된다. 옛날처럼 아기가 먹다 남긴 바나나를 억지로 먹을 일도 없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바나나 하나를 까서 온전히 내 몫으로 먹게 되니 바나나의 참 맛을 다시 알게 된 기분이다.
약간 연둣빛이 도는 바나나는 쫄깃쫄깃하고 약간의 산미도 느껴지다가, 바나나가 점점 노랗게 익고 검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면 달콤함이 절정에 달한다. 어떻게 자연에서 이렇게 단맛이 날 수 있을까.
세상에 태어난 지 겨우 몇 달 된 아기가 맛보았을 바나나를 생각하면 얼마나 강렬한 단맛이었을지, 아기가 바나나가 눈에 띌 때마다 바나나를 사달라고 손짓 발짓으로 온몸으로 표현했던 것이 이해가 간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우리 집에 바나나가 돌아왔다. 올 가을엔 특히 과일 값이 너무 비싸 상대적으로 저렴한 바나나를 자주 구매했더니 바나나가 또 시들기 시작한다.
날파리 꼬일 걱정은 없는 계절이지만 너무 까매지고 무르기 시작하면 먹을 수가 없으니 검은 반점이 생긴 바나나로 머핀을 만들기로 했다. 바나나 머핀은 만들기도 쉽고, 실패할 일도 적으며 아이들과 함께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무엇보다 남는 바나나를 몽땅 처리할 수 있으니 종종 아이들과 '엄마표 쿠킹클래스'를 연다.
이번 조리 때엔 바나나를 네 개나 넣었으니, 설탕을 100그램만 넣었다. 계란은 세 개, 약 150그램 정도가 들어가고, 냉동실에 아몬드 가루가 있어서 밀가루 대신에 아몬드 가루를 120그램 정도 넣고 버터도 100그램 정도만 넣었다. 바나나가 400그램이니 나머지 재료를 모두 합친 것만큼 바나나가 들어간 셈이다. 바나나가 절반 이상 되는, 정말로 '바나나 머핀'.
그때그때 냉장고 사정에 따라 들어가는 재료의 비율은 다르지만 집에서 만들어 먹는 맛은 언제나 맛있다. 아이들이 재료를 으깨고 섞고 저울로 계량을 하며 숫자 놀이까지 했다. 대충 잘 섞기만 하면 되니 아이들에게 맡겨도 충분하다. 오븐에 넣기 전에 냉동실에 있던 블루베리가 생각나서 블루베리 넣어줄까? 물어보니 좋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블루베리 바나나 머핀이 되었다. 남은 반죽은 브라우니 틀에 구워 식혀서 냉장고에 보관한다. 다음 주 든든한 한 끼 아침식사가 되어줄 것이다.
바나나가 구워지는 달콤한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다. 비 오는 가을 아침과 너무 잘 어울리는 낭만적인 냄새이다. 갓 구운 머핀을 한 김 식혀 아이들과 아침으로 먹는다. 제 손으로 만든 머핀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더 잘 먹는다. 바나나, 아몬드 가루, 블루베리, 계란과 버터가 들어갔으니 맛이 없을 리가. 시중에 파는 것에 비하면 설탕량을 획기적으로 줄인 머핀이지만 충분히 달콤하다.
마구 으깨고 섞어주세요
내가 아이들의 먹거리를 만들며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거다. 아이들이 집에서 만든 음식을 기준 삼아서 나중에 바깥 음식을 먹으면서도 음식이 너무 달다, 너무 짜다, 너무 맵다 하고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것.
지금이야 아이들의 식사가 거의 나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조금만 더 자라도 바깥 음식 먹을 일이 더 많아질 텐데 적어도 건강한 음식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을 스스로 잡을 수 있었으면, 너무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는 분별력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형마트 베이커리를 종종 이용하는 편이지만, 거기서 달콤한 빵 종류는 잘 구매하지 않는다. 집에서 만드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달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생일 케이크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은 집에서 간단한 머핀, 케이크를 구워서 먹는다. 설탕이 덜 들어간, 설탕 대신에 바나나가 들어간 빵 종류를 먹으면서 나는 아이들 입에도 이게 단맛의 기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집에서 먹는 음식은 최대한 싱겁게, 심심하게 만든다. 모든 재료를 유기농 1등급으로 사진 못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신선하고 첨가물이 적은 제품을 구매한다. 아이들의 입맛이 단순하고 덜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졌으면 좋겠다. 바깥음식이라는 '정글'에 나가서, 조금이라도 덜 해로운 음식을 골라 사 먹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마라탕이 지나간 뒤에 바로 탕후루 열풍, 청소년들이 매운맛과 단맛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음식을 점점 자극적으로 만들어 파는 어른들의 책임도 클 것이다. 사회가 돌아가는 방향을 바꾸기에는 내가 가진 힘이 너무 미미한 걸 어쩌랴 싶지만, 오늘도 나는 선 자리에서 바나나 머핀을 굽는 것으로 실천을 대신한다. 달콤한 바나나 머핀의 냄새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진다.
완성품. 냠냠
※바나나 머핀 굽는 법
머핀이나 파운드케이크는 계란, 밀가루, 설탕, 버터의 양이 1:1:1:1로 들어가는 것이 기본이다. 여러 변형이 가능하지만 나는 집에서 베이킹을 할 때에는 비정제 설탕으로, 설탕량의 4분의 3만 넣는다. 그 정도만 넣어도 충분히 달콤하다. 바나나 머핀을 만들 때에는 설탕 비율이 더 줄어든다. 절반에서 3분의 2 사이로만 넣어도 바나나의 단맛으로 충분히 달콤한 머핀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