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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Sep 19. 2022

둘째의 한글 공부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게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엄마! 아빠 라면에 피읖이 있어.


신라면을 푸라면으로 알고 둘째가 매울 신 辛자에서 피읖을 읽어낸다. 매직아이도 이런 매직아이가 없다. 둘째는 다섯 살, 11월 생이라 아직 만으로 46개월이다. 일곱 살 형아 옆에서 어거지로 한글 공부를 하는데 엄마의 의지도, 본인의 의지도 아닌 왜 나만 공부하냐는 형아의 민원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그래도 깍두기 한글 공책 한 페이지 정도는 으레 써야 하는 줄 알고 앉아서 쓰는 것이 신통하다.


큰아이가 네 살 후반에 연령에 맞는 한글 홈스쿨 워크북을 사서 던져주었다. 둘째가 돌도 안 된 아기일 때라 내가 붙어서 참견할 여유가 전혀 없어서 정말 던져주었다. 색연필이며 네임펜을 가져다가 점선을 따라 그리기로 시작해 제법 손아귀 힘이 붙어 한 획 한 획 긋는 것이 정말 쓰는 것 같아 기특했다. 똑똑한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다.  


그런데 다섯 살, 여섯 살이 되면서도 손아귀 힘만 좋아질뿐 글씨를 보는 데에는 전혀 진전이 없어 보였다. 받침 없는 기본 글자를 할 무렵. 웬일로 아이의 옆에 붙어 앉아 이거 뭐라고 쓴 거야?라고 물어보니 김밥.이라 한다. 정답은 가지였다. 가지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밑에 따라 쓰기 점선이 되어 있었는데 막눈이 첫째는 가지를 김밥으로 보았고 가지를 쓰고 김밥이라 읽은 것이었다. 가관은 다음장이었다.  그럼 이건 뭐라고 쓴 거야?라고 물어보니 꿀벌이라 한다. 정답은 파리였다. 막눈이는 막눈이다. 파리가 꿀벌로 보였나 보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 한글 워크북들을 싹 다 치워버렸다. 그리고 준비한 깍두기공책.


일곱 살 형아가 혼자 쓰는 그림일기. 띄어쓰기가 엉망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


기역, 니은부터 다시 시작했다. 파닉스부터 고등 영어문법을 수년간 가르친 영어강사 이긴 했지만 한글을 가르쳐 본 적은 없었기에, 기억도 그그 기역이라고 하며 발음과 쓰는 법을 가르치고 온갖 굴러다니는 비닐 파일에 모음과 받침을 넣어가며 자음에 결합시켜 읽어보는 글자 조합 연습을 했다. 첫 아이는 하루아침에 달라진 엄마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하였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엄마도 다섯 살에 한글을 떼고 유치원에 갔으니 너는 여섯 살이니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기역, 니은을 시작해서 대망의 첫 그림일기를 쓰기까지 석 달이 채 안 걸린 것 같다. 아이가 여섯 살이라 네다섯 살 때보다는 훨씬 수월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글씨의 조합을 신기해했다. 그렇다. 세종대왕님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이유가, 의미가, 의의가 여기에 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 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사람마다 해여 수비니겨 날로 쑤메 뼌한킈 하고져 할따라미니라.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맞지 않으니

사람마다 하여 이것을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한글은 통 글자가 아니다. 통 글자인 한문을 배우기가 힘드니 통 글자가 아닌 소리 글자로 창제하신 것이 우리 한글인데 아이들의 학습지에는 자꾸 통 글자 학습의 효율성, 적합성, 유아 친화성을 강조한다. 나는 그 이유를, 한글이 하루아침에 통 글자가 된 이유를 학습 연령이 낮아져서 라고 생각한다. 우리 때 일고 여덟 살에 주로 배우던 한글을 네다섯 살, 빠르면 서너 살짜리들에게 가르치려 하니, 글씨가 그림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일이다. 그렇게 눈에 익혀 외운 그림이 모이고 모여 글자 학습이 되는 경우가 있다지만, 세종대왕님께서 아시면 얼마나 애통해하실 일인가 말이다.


요즘 아이들이 똑똑하여 어린 나이에 별거 별거 다 배울 수 있어졌다해도, 그래도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익힐 수 있을 정도까지 큰 다음에 배워도 충분하다는 것이 큰아이 홈스쿨 워크북 실패의 교훈이었다.


그래서 둘째는 한글 공부를 일찍 시키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는데, 더구나 지금은 다섯 살이고, 생일도 11월 생이니 6세 중반 이후에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큰 놈의 민원이 장난이 아니다. 나는 네 살 때도 공부책이 있었다는 둥, 어쩌는 둥. 그래서 옆에서 하는 연필 잡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한글 공책에 끄적이게 해 주니 두 달 만에 자음을 대충 알게 되었다. 비록 시옷을 쓰고 고래밥 할 때 시옷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글씨를 보면 자음을 찾아내며 아는 척을 한다.


시옷!!!!


그리고 이제 모음 연습을 시작하려고 한다. 다섯 살에 한글 공부라니, 유난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도 패드도, 학습지도 아닌 깍두기공책으로 하는 한글 공부라니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모르겠지만, 큰 아이의 민원이 상당하여 안 할 수도 없다.


오늘도 하원 후에 쓸 한 페이지 분량을 내가 미리 써 두었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잘 따라 쓰고 읽어보라 하면 다 가가가 가가가가라고 읽어 버리지만, 그래도 앉아서 자기 할 분량의 학습을 끝내는 연습을 한다는 건, 아이의 공부 인생에 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한다.


이따 보자.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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