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들어 바나나가 다시 좋아졌다. 바나나가 비싸고 귀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건 아니다. 그 정도 연배는 아니다. 하지만 달콤하고 부드러운 바나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맛있는 간식이었다. 꼭지에만 약간 연둣빛이 남은 바나나는 쫄깃쫄깃 한 맛이 있고 노랗게 익은 바나나는 부드럽다. 검은 반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바나나는 껍질도 얇아지고 과육도 흐물흐물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단맛이 절정에 달해 그 역시 맛있다. 바나나는 맛있다= 나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그 진리는 큰 아이가 바나나를 간식으로 먹을 수 있게 된 4개월 아기가 되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요만큼씩 먹던 시절엔 바나나 한 송이가 너무 많았다. 정성의 아침식사. 바나나, 냉동 딸기 콩포트, 바나나, 흰 우유.
아기들은 분유 혹은 모유만 먹다가 생후 4개월이 되며 바나나, 배, 사과 등의 과일 간식을 공식적으로 허락받는다. 뭐 그 전에도 알게 모르게 과즙을 먹이는 경우가 있고, 먹고 탈이 안 나면 된 거라는 만고 불변의 진리가 있긴 하지만, 인터넷과 육아서적, 소아과에서 제공받는 영유아 검진 결과 안내문 등에 모두 시기 별 섭취 가능한 음식이 리스트 되어 있는데 아마 소화가 쉽고 알레르기 유발 가능성이 적은 음식부터 차례로 허용되는 듯하다. 그중 첫째 중 하나가 바나나다. 아기가 으깬 바나나를 오물거리는 모습에 흠뻑 빠져 우쭈쭈쭈 하는 것은 잠시, 집에는 바나나가 언제나 끊이지 않게 되었고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섭취해야 하는 바나나는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골치 아픈 계륵이 되고야 말았다. 얼리면 된다지만, 얼리는 것도 한두 번이고 우리 집 아기는 바나나를 먹어봐야 반 개 먹을까 말까 였는데 바나나 한 송이는 거의 다 내 몫이 되었다. 그렇다고 바나나를 안 사자니, 산책길, 외출 길에 바나나가 눈에 띌 때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달라고 표현하는 아기의 의사를 무시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나나가 이런 존재가 되다니. 난감하네
필리핀 마트의 바나나 코너, 우리나라랑은 레벨이 다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바나나의 단 맛에 산미가 느껴져 맛이 더 풍성했다 할까.
편의점에서 한 두 개 사는 방법도 있긴 한데, 한 두 개 값에 조금 더 하면 열개 들은 한 송이를 살 수 있으니 편의점 바나나는 잘 안 사게 되는 이상한 절약정신도 피곤해졌다. 바나나, 있으면 남고 없으면 아쉬운 존재. 게다가 여름엔 날파리가 엄청 생기니, 껍질을 까서 냉장보관하는 방법도 시도해 보았는데, 찬기가 들은 바나나는 또 손이 잘 안 가게 되며 결정적으로 냉장고에 넣는 동시에 바나나의 존재를 잊어버려 까맣게 무른 채로 발견되기 일쑤였으니. 그나마 둘째가 태어나 자라며 먹는 입이 하나 늘어 조금 덜 해지긴 했지만, 애들 어릴 때는 바나나가 지겨운 나머지 싫어질 정도였다.
그렇게 설 자리를 점점 잃는 듯하던 바나나가 요즘 다시 제 위상을 되찾고 있다. 일단 한 송이 사도 애들이 예전보다 먹는 양이 늘어 얼추 다 없어진다. 가끔 두어 개가 검은 반점이 생긴 채로 매달려 있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바나나로 머핀을 굽는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머핀 굽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버터, 설탕, 밀가루, 계란을 넣은 간식을 아기에게 주는 것은 금기에 금기에 금기에 금기를 더한 행위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뭐라고 그렇게 조심했나 싶은데, 외국 아기들은 잘 만 먹고 자라던데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엔 바나나 한 송이를 망설임 없이 산다. 이걸 어찌 먹나 하는 걱정이 아니라 치솟는 물가에 가격을 보며 망설일 뿐. 우리 아이들은 완숙된 바나나보다 약간 연둣빛이 남은 쫄깃쫄깃한 바나나를 더 좋아한다. 바나나가 남으면, 두어 개가 검은 반점이 생긴 채로 익어가면 바나나 빵을 만들 준비를 한다. 원래 파운드케이크의 레시피는 밀가루, 계란, 설탕, 버터의 비율이 일 파운드씩, 즉 네 가지의 재료가 동량으로 들어가는 레시피인데 홈베이킹은 하는 사람 마음이다. 바나나를 으깨 준비하고 그만큼의 계란, 버터는 그 보다 조금 적게, 밀가루는 바나나의 삼분지 일 정도 잡을 때도 있다. 어쩔 때는 1:1:1:1 비율에 바나나만 더 추가할 때도 있고, 생크림을 버터 대용으로 사용할 때도 있고, 버터를 휘핑해서 쓸 때도 있고 그냥 전자레인지에 녹여서 사용할 때도 있다. 바나나 양도 언제는 하나, 언제는 두 개, 언제는 세 개다. 설탕 양도 바나나가 들어가니 조금 더 줄여 잡는다. 어떤 때는 토핑으로 엠앤엠즈를 올릴 때도 있고, 아니면 다크 커버취 초콜릿을 녹여서 마블 파운드 흉내를 낼 때도 있고, 화이트 초콜릿을 청크로 사용할 때도 있다. 초콜릿을 넣는 날은 설탕 양을 조금 더 줄인다. 신기한 건 그렇게 들쭉날쭉 넣는 설탕으로도 빵의 당도는 내 입에는 그럭저럭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손 맛인가. 나는 나물 무침, 각종 겉절이등의 밑반찬 보다 바나나빵 만드는 것이 훨씬 쉽다.
처치 곤란이라는 오명을 벗고 나니 바나나가 다시 좋아졌다. 바나나를 지겹게 먹어야 했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 그 시절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바나나 한 송이. 다음에 보이면 사 와야겠다. 쫄깃쫄깃 싱싱한 바나나를 아이들에게 주고, 나도 먹다 남긴 거 말고 새거 하나 따 먹고, 아침으로는 삶은 달걀, 딸기콩포트 한상 말고 바나나 하나 띡 던져주며 그렇게 한 송이 먹다가, 남으면 또 빵 굽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