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둘째의 생일에 잡채를 만들었다. 결혼을 하고 내 손으로 잡채를 만든 것은 열 번 정도 되는 것 같다. 처음 만든 잡채가 까만 색깔을 간장으로 내려는 바람에 좀 많이 짰던 것을 빼고는 맛은 다 그럭저럭 괜찮았던 편이다. 채소와 고기를 볶고 당면을 삶으면 되는, 사실 간만 맞추면 맛 내기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음식이기도 하다. 다만 색색의 다양한 채소를 채 썰어 볶아야 한다는 것이 손이 많이 가는 느낌이고, 명절 혹은 생일에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에 자주 해 먹지는 않게 된다.
인터넷에 보면 시간이 지나도 불지 않는 잡채의 황금 레시피가 많이 있다. 불린 후 몇 분을 삶기, 삶아서 찬물에 헹구기, 아니면 뜨거운 채로 기름에 볶기 등 집집이 각각의 비법들로 잡채 만들기를 소개한다. 그런가 하면 남은 잡채 처리용 레시피도 많다. 김말이를 만든다, 달걀 만두를 부쳐먹는다 등등 각자의 꿀팁들을 소개하는 포스팅도 많이 있다. 호불호가 거의 갈리지 않는 인기 음식 잡채의 유일한 문제는, 어쩌다라는 부사에 하는 김에 라는 말이 합쳐져 한 번 할 때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먹고 남은 잡채가 냉장고에 들어가고 시간이 지나 맛이 없어진 잡채를 어떻게든 데워서 먹거나 다르게 요리하여 해치우는 것이 필수불가결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황금 레시피를 따라 이리저리 해 봐도 냉장고에 들어가고 시간이 지나면 당면은 불기 마련. 처음의 식감은 처음이 아니고서는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직 부족한 내 솜씨 탓일수도 있다.
어쩌다, 하는김에 (많이) 하는 사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만의 잡채 레시피가 완성 단계에 올랐다. 바로 채소를 왕창 볶아 스텐 밧드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놓고, 먹기 전에 한번 먹을 만큼의 당면만 삶아 뜨거운 김에 차가운 채소들을 함께 무치는 것. 뜨거운 물에서 바로 건진 당면의 열기에 냉장고 안에 차갑게 있던 볶은 재료들이 따뜻해지고, 간장과 참기름으로 간 맞추기만 마무리하면 한 끼 잡채가 완성된다. 이번 둘째의 생일에 준비한 잡채 재료로 잡채를 세 번 해 먹었는데 세 번 다 미리 볶아 둔 재료들을 이용해 당면만 그때 그때 삶아 새로 무친 잡채를 맛있게 먹었다. 남은 채소로는 함박 스테이크의 소스에 넣기도 하였고, 마지막 조금 남은 잡채는 가위로 작게 조사서 계란말이를 해 먹으니 일주일간 잡채 재료로 집밥 해 먹기가 조금은 수월 하였다.
한 번 먹을 분량.
이쯤 되면 잡채 만들기의 가장 큰 과제는 당면 다루기로 보인다. 당면을 어떻게 해야 식감을 잃지 않고 맛있게 먹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데 전통 음식이라는 느낌이 강한 이 음식을 오뚜기 당면이 없던 옛날에는 어떻게 만들어 먹었을까가 궁금해졌다. 설마 수타? 칼국수처럼 칼당면? 손수제비처럼 손당면?
1670년의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잡채 만드는 법을 살펴보면, “오이, 무, 댓무, 참버섯, 석이, 표고, 송이, 녹두 길음(숙주나물)은 생으로, 도라지, 거여 목, 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승검초, 동아, 가지, 생치(꿩)는 삶아서 찢어 놓는다. 생강이 없으면 건강, 후추, 참기름, 진간장, 밀가루를 양념으로 쓴다. 각색 재료를 가늘게 한 치씩 썰어 각각 기름, 간장(진간장)에 볶아서 섞어 큰 대접에 담는다. 즙을 적당히 붓고 위에 천초, 후추, 생강을 뿌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시대에는 잡채가 볶은 채소를 섞은 음식으로 면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광해군이 특히 좋아했던 음식이라고 하니 고급 궁중음식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면을 사용하지 않는 갖가지 채소를 볶은 것이었고, 주 재료가 없이 그때그때 재료를 달리 사용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공장이 들어서고 나서야 우리나라에서 당면이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1940년대에 나온 요리법에나 되어야 잡채에 당면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당면을 쓰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니 권하지 않는 사항이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적잖이 놀랐다. 당면을 쓰는 것을 굳이 좋지 않다고 할 것 까진 없지 않나.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좋지 않다는 뜻일까. 나는 파프리카, 양파, 버섯, 고기, 당근과 당면을 쓴 나의 잡채는 그럼, 그 시대에는 듣보잡인 음식이었겠구나.
요즘에는 한식의 대표주자중 하나인 잡채, 그 모습에 당면이 빠진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찌보면 전통이 사라져 버린 전통음식인 셈이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사랑도 변하듯, 굳건히 지켜질 것 같은 전통도 시대에 따라 이렇게 변한다. 잡채의 변화를 보며, 달라진 당면의 위상을 보며, 첫 데뷔 무대에서 혹평을 들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을 떠올린건 조금 오바일까.
어쩌면 지금 굳건해 보이는 잡채의 모습도 조만간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탄수화물 최소화에 들이는 노력을 생각하면 조만간 당면없는 잡채가 유행할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저탄잡채. 밥 없는 비빔밥, 밥 없는 김밥등도 저탄식단으로 많이 소개되고 있으니 잡채라고 안그럴까, 이미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의 생일 잡채를 만들어 주며 공부를 한 기분이다. 잡채는 궁중 음식이었던 것은 맞지만, 당면을 사용하진 않았고 지금 먹는 잡채는 한 때 좋지 않은 잡채의 예로 소개되기도 했던 잡채의 모습이니, 세상은 변한다는 것, 지금 좋다고 영원히 좋은 것도, 지금 나쁘다고 영원히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 지금의 전통도, 진리도 언젠간 바뀔 수도 있다고 말이다. 마치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몇 년 전의 일기 한 줄 처럼.
며칠 전 친구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버티면 좋은 날 오겠지. 딱 들어맞는 예를 찾았다. 바로 잡채, 정확히는 당면 잡채 말이다. 전통음식이라 믿었던 이 당면 잡채가 80년전만 해도 좋지 않은 예로 쓰였다니, 지금 좋지 않아 보이는 모든 것들도 조석간에 큰 반전을 맞아 무언가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 할지 누가 아느냐 말이다.
버티면 좋은 날 오겠지. 이래저래 요즘 힘든 날 보내시는 분들, 잡채를, 정확하게 당면 잡채를 생각하며 힘내 봅시다. 하지만 좋은 날 맞아도 자만하지 맙시다. 저탄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위상이 하락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