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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Nov 25. 2022

겨우 80점.

마음은 변치 않았지만, 머리는 변했어.

 100퍼센트 자의로 시작한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심화 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보름 남짓 되는 기간 동안 틈틈이 유튜브로 강의를 듣고 기출문제 풀고, 생전 안 읽던 만화책 (역사만화)도 빌려다 보며 노력을 했건만, 그 틈틈이의 구멍은 생각보다 컸다. 첫 모의고사에서 50문제 중에 19문제를 맞고는 절망에 빠졌었는데 오늘 겨우, 그래도  80점을 맞았다. 이 전에도 88점 맞은 기출 모의고사가 있긴 했는데 그건 역대급 쉬웠던 시험이라 하니 제쳐 두기로 하였다.


2년 상간의 일을 이렇게 내는 건 반칙 아닙니꽈!!!!!!!!!!!!!!!!

 솔직히 조금 하면 쉬이 될 줄 알았다. 학교 다닐 때 나름 똘똘한 머리를 자랑했던 나이고, 게다가 국사는  암기과목이라 고득점을 놓친 적이 없다. 아무리 내 머리가 20년 나이를 더 먹었기로서니 이게 이렇게 안 외워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다. 학교 다닐 땐 그래도 시험 범위가 500년 내지 천년 단위였는데, 이번엔 반만년 역사를 50문제 안에 통틀어 시험을 본다. 한 문제의 사료 한 개와, 5지 선다에 고려, 가야, 신라, 조선 전기, 조선 후기가 모두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러면 쉬운 문제이다. 대부분 각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것이 보기로 나오니 말이다. 한 문제에 10년이 안 되는 기간의 사건 개요를 묻는 문제가 어렵다. 주로 개항기 조약과 전쟁, 개혁, 그리고 다시 조약과 전쟁과 개혁이 일어나던 시기가 문제로 나오면 1-2년 단위로 순서를 맞추어야 하니 그건 풀기가 까다롭다. 1000년 역사 문제는 쉽고, 10년 역사 문제는 어렵고, 이런 아이러니라니. 이것도 세계사적으로는 21세기 한국식 객관식 시험의 특징이라 하며 몇 백 년 후에 시험 문제로 출제될까.


 영조의 승정원일기 한 권을 번역해봐야 한 달분이 채 안 된다고 하던데, 그 번역 작업이 일 년이 걸린다고 한다. 영조의 재위 기간이 52년인데 한 달 치의 승정원일기를 1년에 걸쳐 번역 작업을 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반만년 역사를 3주 만에, 50문항을 풀어서 시험을 보는 게 우리 역사를 아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너무 모르는 건 곤란하다. 그래서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삼국의 통일전쟁에서 한번, 조선의 사화와 붕당정치에서 한 번,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쟁에서 한번,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광복 이후 한국전쟁 발발 시기에도 이념갈등이 많아서 헷갈리고 또 헷갈린다. 무식 한 티 덜 내고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흐름은 잡았지만, 그걸로 문제를 풀 순 없다. 배점이 높고 까다로운 문제는 더욱 그렇다.


신라, 가야, 고려, 조선 전기, 조선 후기가 한 문제에 같이 있다.


 한국사 시험을 봐야겠다 마음먹은 건 국립박물관에 방문해서 깜깜이 까막눈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아차 싶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몰라도 이렇게 모르는 건 용납이 안 된다. 나는 시험을 봐야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 시험은 필요악이다. 다행히 요즘은 무료 강의가 너무 잘 되어 있어서 교재만 구입하면 수업을 듣는 것이 어렵지 않다. 강의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교과서에 밑줄 긋고 별표 치고, 판서를 필기하고, 문제집을 풀며 영혼 없는 암기로 국사를 배웠던 나로서는 이렇게 역사의 흐름, 의미, 재미에 시험 범위를 고루 잡아주는 수업이 너무 신선해서 몰입도 잘 되었다. 그저,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오늘 뭐 먹지 귀신이 방해를 하고, 빨래 괴물이 어른거리며, 불구덩이에 있는 설거지옥이 애타게 나를 찾아 진정으로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아쉽게도 너무 짧았을 뿐이다. 이래서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인가 보다. 공부는 궁뎅이로 하는 것도 있는데, 아줌마가 되니 궁뎅이 붙이고 앉을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없어졌다. 공부를 틈틈이 하였지만, 아이들 등원시키고, 아침 먹은 것 치우고, 나 커피 한 잔 마시고, 집 치우고, 반찬 하나 해놓고, 밥이 떨어지면 밥도 안치고, 공부방 수업이 있는 날은 수업 준비를 하고 나면 아이들이 오는 시간이 얼추 된다. 그 시간 틈틈이에 강의 듣기와 기출문제 풀이를 집어넣은 나를 그저 칭찬한다.


 

 80점, 1급을 가르는 커트라인이다. 이것이 이렇게 힘들게 넘는 고개인 줄은 몰랐다. 운이 좋아 80점이다. 선택지 두 개 남겨놓고 찍은 것을 만약 다 틀린다면 훨씬 낮은 점수이다. 내 참, 고생을 사서 해도 유분수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하는 것 그 자체보다 시험을 잘 보는 쾌감을 좋아했던 것 같다. 눈이 뻘게지도록 외우고 빛의 속도로 까먹는 일이 반복되는, 깊이 있는 탐구보다는 벼락치기 시험에 능했던 나다. 그러면서도 룰루랄라 즐겁게 학교만 잘 다녔는데 왜 이제 와서 공부가 하고 싶은지, 왜 심지어 그게 재밌기까지 한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아마, 제대로 하지 못 하는 상황이니 더 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이지 싶다.


 겨우 80점. 중의적 표현이다. 에게게 겨우 80점? 이기도 하고, 헉헉헉 겨우 80점. 이기도 하다. 둘 다 맞는 사실이다. 난 백 점 맞고 싶은데. 그래도 한국사를 공부하며 얻은 깨달음이 있다. 위정자, 위인, 저명한 학자와 종교인들의 천년의 시간도 한 문제로 퉁쳐지는 것이 인간사인데, 미물 중의 미물인 나, 작은 일에 열 내지 말자. 그게 무슨 의미라고.


애들은 엄마가 뭘 하는지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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