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멋쟁이 한제 Nov 30. 2022

보약 대신 시금치

사실은 흑염소 진액도 먹습니다.

 요즘 장을 볼 때마다 시금치를 산다. 지난 추석 때쯤 한단에 만원을 호가하던 귀한 시금치 가격이 안정권에 들었다. 제 철을 맞 까닭이기도 하다. 겨울이 제철인 시금치라, 여름엔 이런저런 하우스 농법이나 농약이 많이 사용될 것 같아 여름 시금치는 잘 사지 않는다. 맛도 겨울 것보다 덜하다. 날이 추워지며 시금치 가격이 내려가고, 시금치에 단 맛이 들기 시작하면 시금치는 장바구니 단골손님이 된다.

시금치 된장국

 

 나는 시금치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거의 찬양하는 수준이다. 20대 초반에 몸이 아주 안 좋았던 적이 있었다. 언제라고 튼튼한 체질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정말 너무 병약해져 학교 통학하는 것도 너무 힘들 정도였고, 빈혈 수치 정상치의 절반, 혈압도 최고 혈압이 80도 안 나오는 그야말로 비리비리한 상태였다. 엄마는 막내로 태어난 내가 노산 엄마의 젖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 것 아니냐며 수 십 년 전 일까지 들먹이며 나를 걱정하셨다. 홍삼도 먹이고, 분유도 먹였다. 홍삼은 기력을 회복하라고, 분유는 한 잔에 모든 영양소가 다 들어있지 않겠냐며 요즘 나오는 단백질 음료처럼 생각하셨는지 뜨끈하게 분유 한 잔, 홍삼 한 팩, 수시로 병원에 데려가 영양제를 꽂아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정신이 몸을 지배하였던, 그 약한 체력에도 빠지지 않았던 술 때문인 것 같은데, 엄마와 아빠는 나의 허여 멀 건한 눈꺼풀, 핏기 없는 입술을 볼 때마다 끌탕을 하시며 온갖 것들을 다 먹이셨다. 철분제, 비타민 포함.

시금치 바나나 주스, 맛있어요.

 그러다가 운명처럼 알게 된 것이 생 시금치 갈아먹기였다. 통학하던 지하철에서 누가 읽고 올려 둔 잡지 같은 읽다가 발견한 건강 상식이었는데, 시금치를 생으로 갈아서 먹으면 시금치가 가진 영양소를 온전히 섭취할 수 있어, 빈혈과 원기 회복에 좋다는 글이었다. 핸드폰이 폴더 폰 시절이라 가능한 이야기이다. 지금 같았으면 지하철에 그런 잡지가 있지도 않을 것이고 핸드폰이나 책도 주로 내 취향에 맞는 글만 선별해서 보게 되니 우연히 그런 글을 접한 것은 당시의 정말 큰 행운이었다.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니 당장 갈아 주신다. 아마 시금치 아니라 무엇이었어도 내 몸에 좋다면 해 주셨을 거다. 시금치를 그렇게 며칠 갈아먹으니 눈꺼풀과 입술에 혈색이 돌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약보다, 주사보다 가시적인 효과가 금방 나타나니 엄마는 정말 열심히 갈아주셨고, 나도 내가 죽겠으니 맛없어도 열심히 받아먹었는데 사실 그렇게 맛없진 않았다. 겨울이었나 보다. 달큰한 맛이 나기도 했고 엄마가 어느 날은 간 시금치를 또 걸러서 초록색 물만 받아주고, 건더기로는 맛있게 전을 부쳐주기도 하며 그렇게 시금치를 한동안 먹고는 나는 몸을 회복하였다. 시금치도 먹었고, 주사도 맞았고, 홍삼도 먹었고, 여러 가지 다 해서 꼭 시금치 덕만 봤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부터 시금치, 그것도 겨울 시금치는 나의 보약이다.


시금치 샐러드.


 요즘엔 초고속 믹서기도 잘 나와서 정말 이물감 없는 주스 만들기가 가능하다. 시금치와 바나나를 함께 갈아 더 맛있게 먹기도 하고 애들도 조금씩 먹인다. 제 몫을 주면 안 먹는데 엄마가 먹고 있으면 한 입씩 달라고 하니 웬만하면 애들 보는 앞에서 자랑하듯 먹는다. 바나나의 단 맛에 바나나 시금치 주스는 물만 조금 넣고 갈아도 달콤하고 맛있다. 최근엔 베이비 시금치라고 시금치 어린잎을 따로 파는 것도 있다. 크기가 작고 줄기가 억세지 않아 샐러드 용으로 좋다. 아이들이 먹기에도 전혀 질기지 않는데 아무래도 초록색을 그냥 먹으라 하면 안 먹겠다 해서 토르티야에 토마토와 치즈, 시금치를 얹어 마르게리따 피자처럼 만들어 주니 아주 잘 먹는다. 시금치는 나물이나 국으로 먹어도 좋지만 생으로 먹어야 영양을 온전히 섭취할 수 있다고 한다. 결석이 생긴다는 말도 있는데 사람이 결석이 생길 만큼의 생 시금치를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고.



 나는 겨울이 되면 몸을 웅크려서 그런지 여기저기 몸이 더 결리기도 하고 외출도 귀찮다. 애들이 있으니 감기라도 걸릴까, 더 몸을 사리게 되는 계절이다. 시금치는 이 계절에 한파를 몸으로 받아내며 단 맛을 채우고 영양을 높인다. 마트에서 시금치를 사서 먹을 때, 손에 흙 한번, 물 한 번 안 묻히고 그 수고를, 노고를 공짜로 받는 것 같아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하다. 나를 살려낸, 우리 엄마의 걱정을 덜어낸 시금치, 겨울 시금치는 감사고 사랑이고 보약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국물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