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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가나나 Feb 14. 2021

아빠의 유산.

나는 작은 소도시 거기서도 차로 1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에 살았다. 마을 바로 앞이 바다인 전형적인 어촌마을 거기서는 모두 어업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았는데 우리 아빠만은 예외였다. 젊어서 배도 탔고 막노동도 했고 그러다 용접을 배웠다. 조선소가 부흥일 때였고 아빠는 소위 돈 잘 버는 용접공이었다. 우리는 그 깡촌을 벗어나 시내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아빠의 월급봉투는 빵빵했고 거기서 난생처음 2층 침대도 가져봤으며 하루 종일 뜨거운 물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아빠는 시내에 살면서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시골을 그리워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원래의 시골로 돌아왔다.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빨간 벽돌이 붙어있는 단층짜리 주택은 초록색의 옥상이 있었고 작은 마당 한켠엔 동백나무가 있었다. 아파트보다 불편했지만 빨간 동백꽃이 피고 바다가 보이는 그 집을 모두 좋아했다. 처음 그 집에 이사 왔을 땐 엄마와 아빠도 좋아 보였다. 여름이면 손님들이 찾아왔고 그런 날은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봄이면 거실 큰 창 아래 드러누워 의미 없는 말을 나누기도 했다. 사계절 내내 집 앞에서 낚시를 했고 일 년에 몇 번은 조개를 캐기도 했다. 모든 것이 풍성하던 시기였다.


언제부턴가 아빠는 집에 있는 날이 많았고 엄마는 대체로 화가 나 있었다. 뉴스에선 IMF가 터졌고 실업률이 상 최악이라고 했다. 한스밴드의 오락실을 들으며 아빠가 실업 상태일 거라고 짐작했다. 엄마는 점점 생기를 잃고 무기력해졌으며 아빠는 매일 잠을 자지 못하는 것처럼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두 분은 자주 다퉜다. 동갑이었으며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는 늘 그렇게 싸웠고 같이 밥을 먹었으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내기도 했으니깐.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싸웠고 엄마가 울었다. 싸움의 주된 이유는 항상 '돈'이었고 엄마는 이제 돈을 빌리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빚쟁이처럼 전화를 받는 것도 진절머리가 난다며 짐을 쌌다. 한쪽 손잡이가 떨어진 갈색 여행가방을 들고 엄마는 집을 나갔다. 얼마 뒤 우리 부모는 이혼을 했다. 우리 형제는'가난한 이혼가정에 사는 더 불쌍한 아이들'이 됐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둘은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간섭했고 보통의 부부처럼 지냈다. 가끔은 재결합을 할 것처럼 엄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 집은 부산스러웠다.


아빠와 엄마가 이혼을 했을 때 터울이 많은 언니는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고 난 중학교에 입학했다. 엄마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고 다시 나가기도 했다. 엄마가 없는 날이 조금 오래 지속될 때면 동생들은 내게 엄마와 같은 사랑을 갈망하는 것 같아 보였고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시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날 전기가 모든 끊긴 집에서 촛불을 밝히고 플래시 불빛에 의존해 지내야 하는 날도 있었고 겨울이면 옥상의 파란 물탱크가 꽝꽝 얼어 물을 퍼다 날라 가스불에 데워 샤워를 하기도 해야 했다. 다림질된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꾸깃한 내 와이셔츠 소매를 만지작 거리기도 했고, 분홍색 소시지 반찬에 빨간 김치가 전부인 도시락 뚜껑을 열며 다른 친구들의 반찬을 스캔해보던 시기도 있었다. 일 년에 반년은 학교에 가져갈 도시락을 싸고 저녁밥을 차리고 집 청소를 하며 동생들과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뉴스에서나 보던 반항끼 가득한 사춘기는 꿈과 같았고 아빠의 일이 잘 풀려서 우리의 집안이 조금 나아지길 바랬다.


짧았던 풍성한 시기가 지나 가을바람에 바삭바삭 말라가는 낙엽 같은 생활이 지속됐지만 그럼에도 행복했다


여름방학이면 아빠는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무작정 떠났다. 큰 봉고차에 텐트를 실어 몇 박씩 자고 오기도 했고 회색 프라이드에 옹기종기 앉아 3000원짜리 밀짚모자를 쓰고 수건을 하나씩 걸치고 당일치기로 떠나기도 했다. 온몸에 짠내가 밸 때까지 바닷속에 들어가 놀았다. 놀면서 먹는 거라곤 고추장 찌개 또는 라면이 전부였고 좁은 4인용 텐트에 다섯 명이 옹기종기 누워 서로의 숨을 나눠마시면 잠을 잤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분에 넘치도록 즐거웠다.


7월에서 8월은 기분 좋은 계절이었다. 밤이면 집 앞에서 수영을 하고 콜라를 얼려 만든 달큼한 아이스림을 베어 물며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 냈다. 토요일 밤이며 검은 바다에 생선 비닐처럼 반짝이는 낚싯대를 드리웠다. 제일 먼저 잡는 사람은 언제나 어깨를 으스댔고 모기에 뜯기면서도 온종일 앉아 누구보다 많이 잡히길 고대하는 밤이었다. 별은 언제나 밝게 빛났고 우리는 여름이 계속 이어지길 빌었다. 화단에 있는 동백나무에 빨간 동백꽃이 필 때면 검게 그을린 피부도 제 색을 찾았고 겨울은 오고 있었다.


우리는 엄마가 없는 생활에 적응했고 아빠는  엄마의 빈자리를 다른 것들로 채워주려고 애썼다. 그런 아빠와 우리의 유대는 끈끈했다. 대문 밖에서 아빠 차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모두 '아빠'라고 부르며 현관으로 뛰어나가 아빠를 맞이했다. 가끔은 전부 쥐 죽은 듯 자는 척을 하기도 했고 아빠는 과자봉지를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은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 항상 꺄르르 웃었고 가끔은 혼났고 울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빠는 차가운 보리차에 따듯한 밥을 말아 마른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라며 건넸다. 토라져 있다가도 그 간소한 상차림 앞에 앉아 밥을 몇 공기씩 비워냈다. 소박했지만 아름다웠고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히 사랑받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가끔, 나는 사춘기의 나를 '꼬질꼬질한 교복을 입고 10년이 넘은 보온도시락통을 들고 있는 단발머리의 가난한 여자아이'로 묘사해서 생각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낸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런 단면을 모아 기록을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사랑스럽고 사랑받았던 아이였음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남긴 건 없다고 했던 아빠, 하지만 아빠는 내가 과거를 치유할 수 있는 기억을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여름밤의 잔잔한 바다처럼 오늘도 난 과거를 기록하고 치유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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