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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가나나 Feb 06. 2021

빛나는 청춘.

10대 후반에서 20대를 일컬어 우리는 청춘이라 부른다. 나의 청춘은 빈곤했고 낯설었다. 고대했던 대학 진학과 대도시로의 상경은 아빠의 반대가 아닌 '꼭 가야 하냐는.'간절한 물음 때문에 입학금을 넣지 않았고 고향에 남기로 했다.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보낸 10대 마지막 겨울방학은 유난히 시리고 고달팠다. 졸업식에서 만난 친구들과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던 건 많이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이의 마지막 자존심 혹은 알량한 자격지심 때문이었고 그렇게 한, 두 명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멀어졌다.


아빠 소개로 들어간 첫 직장에서 '사무직 여직원'을 구한다고 했지만 어린 사회초년생인 난 간식 배달뿐만 아니라 아저씨들의 하얀 목장갑까지 빨아가며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월급은 88만 원을 받았다. 첫 월급을 쥐고서 제일 먼저 달려갔던 게 '아디다스'였다. 두 손을 벌벌 떨며 그때 당시 유행했던 '슈퍼스타'신발을 사고 내 생활비 30만 원을 빼곤 모두 아빠에게 빌려줬다. 빌려준다는 게 그냥 준다는 건 줄 당연히 알고 있었으니 돌려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아니, 불만을 가질 대상조차 없다는 게 가장 정확한 말이 아닐까? 우리 집은 IMF 때부터 가난했고 그 가난의 씨는 발아됐고 열매를 맺으며 커지기만 할 뿐 죽을 기미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라면 사업에 실패한 아빠의 통장은 언제나 차압 중이었고 굴을 까러 다디는 엄마의 벌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일 년에 3개월 정도 일하고는 가사원에 다니며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해야 했다는 것. 이제 내가 가지고 오는 몇 푼의 고정수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기가 끊길 일은 없다는 것과 가스가 떨어지면 가스통을 바꿀 여력이 된다는 것 정도가 대단한 위안이었다.


어쩌면, 20대의 꿈과 자유는 먼 나라 이야기였고 난 진작부터 돈의 노예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꿈을 쫓아가며 가난한 생활을 한다는 이들을 보며 "부양할 가족은 없잖아."라는 부정의 생각만 하며 내 발치에서 쪼르르 누워있는 동생들을 보곤 했다. 눈물도 나오지 않던 청춘.


20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은 8월의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치료받을 돈이 없다' 암을 방치다는 아빠의 말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아픈 삶과 지나온 고달픈 삶이 겹쳐 보였다. 내게 가끔 빌려갔던 10만 원 남짓한 돈도 모두 진통제를 사느라 그랬다는 걸 알았을 땐 멍든 손등을 볼펜으로 계속 내리치듯 아팠다.


아빠는 내게 '가장 편한 사람'이라 말했고 엄마보다도 내가 병원에 남아 있길 원했다. 2주 입원 2주 퇴원을 반복했던 아빠와 보낸 4개월은 내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특히 11월의 유자 밭과 아빠는 잊을 수 없는 그림이 되었다. 푸른 유자 밭이 황금들녘으로 빛나던 11월 아빠는 양손 가득 유자를 들고 환희 웃었다. 그때의 아빠는 내 청춘보다 빛났고 찬란했다.  


아빠의 죽음 이후 여동생의 대학 진학은 내게 어떤 돌파구였고 여동생과 함께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대학생 동생을 뒷바라지하며 여전히 돈의 노예로 살았지만 좁은 원룸에서 여동생과 부대끼며 지낸 시간은 행복했다. 원룸은 비가 오면 끈적끈적했고 가난이 온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그럴 때면 무작정 전철을 탔고 빗소리를 들으며 헌책방을 찾았다. 중소기업 사무직에 근무하면 받는 월급으로 생활비와 방값을 내고 남는 몇 푼의 돈으로 가장 사치를 부리기 좋았던 그곳에서 난 수없이 많은 날을 보냈다.


동생들은 모두 대기업에 취업했고 난 괜찮은 중견기업 사무직을 다녔다. 언제나 가난할 것 같았던 우리 집도 뒤돌아 보니 가난은 추억으로 남았지만 나는 여전히 헌책방을 찾고 한낮의 태양볕 아래 서있는 걸 즐기고 11월이면 유자를 찾는다. 찬란한 적 없던 내 청춘은 어느새 멀어졌다. 멀리서 바라보니 보잘것없던 내 청춘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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