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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가나나 May 24. 2021

일기콘 7일차<보라로 물들다.>

일기콘을 함께 쓰는 분 중 '마음 챙김 아침 걷기'로 글을 쓰는 분이 계신다. 항공업계에서 일하셨다는 그분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진을 종종 올리시는데 눈만 봐도 아름다울 것 같다. 나도 아침마다 걸으면 미모에 꽃이 피려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전 6시에 눈이 떠졌고 미모를 업그레이드시키기에 딱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남편을 깨웠다.


남편과 운동복을 챙겨 입고 집 앞 수변공원을 따라 작은 포구가 있는 마을까지 걷기로 했다. 왕복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걸음이 느린 남편의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걷는다. 그새, 봄이 무르익었다. 꽃이들판에 벌이 모여들어 이름도 모를 꽃송이 안에서 헤엄치며 노란 가루 속을 뒹군다. 남원 여행 중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며 '봄이 이제 가려나' 싶어 한껏 아쉬워했는데 오늘 보니 '한참 무르익어 가는구나'싶은 생각에 내 무릎 아래로 핀 야생화를 가만, 가만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6월이 순 우리말로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넘치는 달이라는 뜻의'누리달'이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5월 말부터 6월의 문턱을 넘을 때쯤이면 봄빛이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이제 곧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때가 오고 있다.'는 생각에 누구보다 여름을 기다리며 생명의 두근거림을 몸으로 느끼며 빛났다. 아빠의 아빠가 그리고 그 아빠의 아빠가 살았던 오래된 옛날 집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살았다. 아랫목이 따듯한 안채와 작은 사랑채가 있던 옛날 집. 재래식 화장실 냄새에 꽃냄새가 섞여 들기 시작하면 바다에 나가 놀아도 되는 때가 가까워졌음을 의미했다. 집 앞 바다에 나가 온종일 몸을 담그고 절여진 배추처럼 집으로 돌아와 수돗가에 있는 큰 빨간 대야에 동생과 함께 들어가 또 물놀이를 했다. 물놀이를 한바탕 끝내고 나면 툇마루에 앉아 오이를 먹었다. 왜 수박이 아니고 오이었는진 모르지만 여름이면 우리 집 냉장고엔 오이가 가득 차 있었다.


아궁이가 있던 부엌에선 해가 뉘엇 뉘엇 넘어 가면 밥하는 냄새와 그을음 냄새가 퍼졌다. 엄마는 해가 떨어져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으러 항상 큰 마당까지 나와 이름을 불렀고 어디에 있든 꼭 찾았다. 그리곤 "밥 냄새나면 퍼뜩 와야지."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해가 떨어져도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아질 때면 물놀이 금지령이 내려졌는데 그럴 때는 집  자그마한 화단에 핀 하얀 분꽃에 든 꿀을 '쫌, 쫌, 쫌' 빨아먹으며 수돗가에 물을 콸콸 틀어놓고 발을 담그고 놀았다. 잠잠히 놀고 눕고 먹기만 했던 어린 시절 그때 나의 모든 것들은 자연으로 쏠려 있었다. 마음 둘 곳이 그곳뿐이었으니 봄이 오는 소리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나이를 먹으며 도시로 흘러들어와 빌딩 숲에 묻혀 지낸지도 15년. 쨍한 하늘을 보는 게 힘들어지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는 게 무뎌지기 시작한다. 집 밖보다 안이 더 편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도통 생기지 않는 홍조를 잃어버린 시기가 찾아왔다. 길에 핀 꽃을 보걷던 때가 언제였는지 보랏빛으로 물든 들판을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어쩌면 마스크 위로 웃는 눈가의 선명한 밝음과 아름다움은 젊음을 기억하는 느린 발걸음에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보랏빛으로 물든 들판에서 분꽃을 하염없이 찾는다. 하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달콤한 꿀이 나오던 그 꽃을 보게 된다면 30년쯤은 어려질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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