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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현 Dec 15. 2022

사탄과 가슴 물구나무 예수

  사탄 티셔츠를 입고 싶었다! 염소 얼굴을 하고서는 가부좌를 튼 자세로 한 손은 머리 옆까지 올리고 다른 손은 무릎 옆까지 내린 채 가슴을 드러낸 사탄! 모니터 너머에 있는 그 이미지에 매료된 나는 어떡하면 저 사탄 티셔츠를 입고 다닐 수 있을지 고민했다.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사탄 티셔츠는 너무 비쌌다. 예수가 그려진 것도 아니면서! 고작 치기 어린 감성을 자극하는 위악적인, 혹은 악마 숭배적인 이미지를 새긴 것뿐인데도 티셔츠는 백만 원을 호가했다. 하기야 남들과 다른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싶은 이들이라면 사탄의 이미지와 가격은 오히려 만족스러울 게 분명했다. 나쁘고 더러운 존재 혹은 개념에는 풍화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또한 그런 이미지는 개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사교 혹은 구애를 주고받을 대상을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기능까지 지니고 있다. 매주 믿음을 동력으로 교회에 나가거나 유니섹스 캐주얼 차림으로 범인류적인 선언을 외치는 것이 삶의 낙인 이들의 접근을 사탄 티셔츠를 입음으로써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뜻이며, 반대 성향을 띤 이들의 접근은 용이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효능을 고려한다면 사탄 티셔츠에는 백만 원의 가치가 있는 셈이었다. 백만 원은 당장 대출 혹은 도둑질 등을 통해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곤란함은 두 번째 문제에 있었다. 내 욕망과는 반대로, 사탄은 지금 무한 복제되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보다 무가치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염소의 주술적 자세는, 방에서 담배 피우는 자세 혹은 철 지난 배낭여행 와중에 지쳐 주저앉은 사람의 히치하이킹, 아니면 그냥 봉구비어에서 먼저 앉아 있다가 다가오는 친구에게 ‘어이~ 여기야~’ 하고 인사하는 자세 따위로 추락해버린 지 오래였다. 위기를 느낀 디자이너들이 사탄을 갓 태어난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심지어는 여성의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는 속성을 이용하여 홍조 가득한 오타쿠 망가 미소녀로 변형시키는 타락을 저질렀지만 이렇다 할 소득을 얻어내지 못한 이단적 이미지에 불과했다. 한편 지저분하고 반동적이던, 그래서 한편으론 억압까지 받던 악마 숭배자들은 이제 누구의 억압도 없는 얼떨떨한 자유에 내던진 상태였다. 이마에 역십자가 문신을 새긴 가짜 숭배자들이 잠깐 들끓기는 했지만, 그들은 삼십 대에 접어들자 밀었던 눈썹에 발모제를 바르면서 피어싱을 뽑았고, 검은자 가득한 렌즈는 결막염을 이유로 멀리하다가 마침내 문신까지 피부과 레이저로 지우는 것으로 그 짧은 유행을 스스로 종식시켰다. 진심 어린 원로 숭배자들은 티스토리, 이글루스, 다음, 심지어는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했는데 보기 좋게 꾸미기는커녕 본문의 폰트를 제멋대로 키웠다 줄이기를 반복한 탓에, 쓰레기 정보나 유통하는 하급 바이럴 블로거보다 못한 취급을 받다가 후진 양성에 실패하며 잊혀졌다. 숭배자들은 극소수의 인원만 겨우 만나 똘똘 뭉칠 수 있었는데, 언뜻 보면 보드게임 동호회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와 설날에 안부와 축하 인사를 주고받고 돈을 모아 생일 선물을 챙겨주며 집단을 유지했다. 그 행태를 지적하는 이는 전부 퇴출당했다. 너무 서운한 지적이었으니까. 이처럼 사탄에게 존재했던 여러 마성은 탈수된 지 오래였다. 이때 배출된 사악함의 원액을 흡수한 것이 기독교적 이미지였다. 여러모로 기독교는 독보적인 규모와 신자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신성함과 사악함이 절반씩 뒤섞인 정신으로 변질했는데, 그 모순이 기독교를 보다 매력적으로 만들어냈다. 특히 예수는 신성함과 사악함의 절정이었다. 마약과 난교 혹은 폭력의 중독자들이 예수의 정신 혹은 이미지를 몸에 걸치고 행동할 때마다 새로운 신도들은 무한 복제되는 이미지를 기꺼이 소비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도 해내지 못한 성취였고, 원리적으로 당연했다. 적그리스도의 모순 없는 이미지는 아기 울음소리 같은 순진함으로 귀결되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사탄 티셔츠를 백만 원이나 내고 구매하는 것은, 그걸 입고 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촌스러움의 극치였다. 해당 시즌 제품군에서 사탄 티셔츠의 재고가 남아도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사탄 티셔츠를 입고 싶었다.

 

  도메스틱 브랜드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도안을 내밀었을 때, 친구는 마지막 시즌오프를 감행하는 것으로 최대한 손해를 메꾸고 사업을 접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뻔한 결과였는데 시답잖은 브랜드 로고를 만든 뒤 그것을 티셔츠 가운데에 박아 넣어 파는 게 친구의 사업전략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미니멀리즘이라는 말로 어정쩡한 브랜드 로고를 포장했으나, 그런 로고 플레이는 거리에서 전형성의 맥시멈을 이루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심지어 친구는 적정가보다 2~3만 원 더 비싼 정가를 설정한 뒤에, 선심 쓰듯 기간 한정 세일을 진행하여 결국에는 적정가에 파는 술수를 벌이곤 했다. 그렇게 세일 기간이 끝난 지 한 달 뒤에는 시즌오프를 시작했다. 장사의 기본은 소비자 현혹이라며 확신에 차 떠들던 친구는 모두가 똑같은 수법으로 현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거나 외면한 듯했다. 나는 그런 친구에게 너를 구원하겠노라, 말하며 도안을 내민 거였다. 곳곳에 쌓인 재고 때문인지 친구의 사무실은 먼지로 가득했다. 우리는 기침과 재채기를 반복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만든 도안은 물구나무를 선 예수였다. 구글링으로 얻은 예수 이미지의 누끼를 딴 다음, 이미지의 위아래를 뒤집고 다시 팔다리의 누끼를 따 각도를 조절하여 만든 자세였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그것은 역오각성을 연상케 하는 형상이기도 했다. 한편 원본의 팔다리를 뜯어 자세를 만들어낸 탓에 예수 이미지에는 본래 없던 여백이 발생했는데, 다리 부분은 늘이고 줄이며 각도를 조절하는 정도라 비교적 양호했던 반면, 양팔이 있던 가슴팍은 뻥 뚫리고 말았다. 물구나무를 선 예수인지 가슴팍을 기준으로 위아래로 절단된 예수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거기에 사탄의 가슴을 잘라 붙여 여백을 가리는 것으로 도안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친구는 모니터에 띄운 도안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다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길단 티셔츠 떼와서 펀딩이나 해 보라면서. 나는 이 이미지를 만들어낸 방식에서 미니멀이 느껴지지 않느냐며 억지를 부려 보았다. 친구는 미니멀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이게 다 빚더미라고…….” 친구는 먼지를 내뿜는 재고 티셔츠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친구의 도메스틱 브랜드에서 취급하는 것은 프린팅 티셔츠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여기 쌓인 재고 중 한 뭉탱이 정도는 무지티였다. 끝내주는 미니멀 화이트와 블랙의. 나는 새로 원단을 뗄 것도 없이 이 티셔츠에 프린팅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다시 돈 이야기를 하는 친구에게 나는 그 비용 정도는 내가 내겠다고 말했다. 왜 굳이 그러느냐는 친구에게, 나는 사탄 티셔츠를 사서 입고 다니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역오각형 모양으로 물구나무 세운 예수 이미지를 유행시킴으로써 원본 이미지인 사탄의 레거시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사탄 티셔츠는 절대로 입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도. 친구는 선잠에라도 빠졌는지 눈을 감은 모습이었다. 나는 친구의 가슴에 쐬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야! 그래도 네가 떼온 무지티가 길단보다야 낫지 않겠니?” 친구는 오랫동안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 

  “그러니까…… 프린트 비용은 네가 낸다 이거지?” 먼 시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듯 피로한 친구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좋겠다면서 종이를 꺼내고 음성 녹음이니 뭐니 떠들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는 친구가 이 먼지 가득한 지옥에 나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은 두려움에 잠시 몸을 떨기도 했다.


  티셔츠는 호황을 이뤘다. 심지어 재고로 쌓였던 다른 티셔츠까지 거진 팔아치웠다. 물구나무 예수 티셔츠의 추가 입고 문의가 폭주하기까지 했다. 친구는 평소의 몇 배나 되는 물량으로 2차 입고를 마치고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공지했다. 물론 이번 인쇄는 친구의 돈으로 했다. 2차 물량까지 품절되자마자 친구는 별다른 공지 없이 사이트를 폐쇄했다. 빚더미에 앉을 뻔했던 친구는 적당히 짭짤한 수익을 내며 사업을 접은 사실에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폭등했던 리셀가는 머지않아 비슷한 디자인의 물구나무 예수들이 보세 쇼핑몰에서 등장하면서 잠잠해졌다. 거리에는 종종 내 도안을 카피한 물구나무 예수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온갖 티셔츠에 남발되는 락밴드의 로고처럼. 나는 그 도안의 저작권을 주장하며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면 그 싸구려 도안이야말로 저작권을 전면으로 무시한 결과물이었으니까. 역으로 난처한 상황에 엮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내게는 싸구려 복제품을 팔아 번 돈으로 진품의 가치를 누릴 수 있다는 만족감이면 충분했다. 사탄의 시대가 올 것이다!

  나는 친구와 나눈 수익으로 사탄 티셔츠를 구매하기 위해 땡겼던 대출액을 갚았다. 금방 품절될지도 몰라서 대출을 끼고 미리 구매한 것이었다. 이제 빚도 청산했으니 드디어 티셔츠는 온전한 나의 소유물이었다. 나는 티셔츠를 입어보았다. 고가의 천박한 생산물을 몸에 두르자 악마적 기운이 내 피부를 뚫고 정신까지 침입해오는 게 느껴졌다. 거울 앞에 서서 자수로 새겨진 사탄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사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겨진 그 촘촘한 골격의 고저가 내 손끝과 기분 좋게 마찰했다. 사탄을 이루는 자수는 똬리를 튼 채 잠든 뱀의 무리 같기도 했다. 아…… 끝내주는군……. 나는 티셔츠를 구매했던 브랜드 사이트에 접속했다. 다음 시즌을 전개하면서 사탄 티셔츠는 스토어에서 내려간 상태였다.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겠지! 내게는 같은 티셔츠가 두어 벌 더 있다. 이것까지 입을 수도 있고, 혹은 프리미엄을 잔뜩 붙여 판매할 수도 있겠지. 나는 사탄이 습기에 오염되지 않도록 포장 내부에 제습제를 넣고서는 옷장 깊은 곳에 넣었다. 어둠 속에서 지속되는 사탄의 주술이 방안에 꺼림칙한 가호를 흩뿌릴 것이었다.

 



  수개월이 지났다. 거리에는 여전히 예수뿐이었다. 예수는 올곧게 서서, 혹은 물구나무를 서서, 아니면 교회의 인테리어나 신자들이 공유하는 말풍선 내부에서, 심지어는 초대형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나타났다. 예수는 신이 아니었다면 쥐나 바퀴벌레였을지도 몰랐다. 사탄의 옛 영광은 복권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사탄 티셔츠를 기꺼이 입고 다닐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여전히 저물지 않은 물구나무 예수의 이미지는 역오각성의 형상이었고, 그건 사탄 이미지의 복제품이었다. 여전히 예수만이 건재한 현상을 마주하며 좌절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탄에 의해 내가 만든 교활한 이미지가 곳곳에 퍼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 이미지는, 직접 몸에 걸친 주체를 넘어, 그걸 바라보는 시선들까지도 서서히 잠식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걸 전도라고 불러도 좋겠지.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전도사를 양성하여 백성들과 마주케 하였으니, 나는 일종의 상위 전도사가 된 게 아닐까? 자부심을 느끼자, 더는 예수와 사탄 이미지가 가진 위계에서 좌절할 필요가 없었다. 도리어 자유로워졌다. 나는 폐허 직전의 이미지를 숭배하는 은밀한 사제로서 기쁘게 사탄 티셔츠를 입은 채로 거리를 누볐다.

  하루는 사탄 티셔츠를 입은 남자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가 사탄에게 보내는 마음이 어느 정도의 깊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같은 이미지를 걸친 내가 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에 시선을 집중했음은 분명했다. 그의 사탄 프린팅은 세탁기와 직사광선을 거치며 곳곳이 찢어진 상태였다. 그는 내가 걸친 선명한 사탄 자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양각 처리된 사탄의 가슴에 현혹된 모습이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은, 사탄의 양각 자수 가슴을 나의 신체와 다름없게 만들었다. 양각 자수 가슴을 보다 풍만하게 보이도록 명치 부근을 부풀린 나는 느린 걸음으로 그의 음탕한 시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무엇보다 음탕함을 지닌 가슴은 부풀려진 수컷의 가슴이니까. 나를 바라보던 그는 자신의, 그리고 빈티지하게 찢어진 사탄의 평평한 가슴을 애써 모아 그러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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