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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현 Nov 11. 2023

[단편소설] 사랑과 흔적(3)

  깜빡 졸았다. 콧속에선 아무 자극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네가 어느새 빠져나갔을까? 어쩌면 이 모든 일은 꿈인지도 몰랐다. 나는 도전적인 심정으로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어떤 방해물도 직면하지 않은 공기가 콧길을 따라 빙글빙글 돌면서 흡입되는 상태를 기대한 행동이었다. 정말로 그렇게만 된다면 해방감에 기뻐하다 바로 잠들 수 있을 것이었다. 어느새 빠져나온 지네를 찾아낼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극도의 너그러움을 휘감은 채 말이다. 그러나 한껏 들이마신 숨에서는 뻥 뚫린 경로에서 벌어지는 공기의 회전운동을 느낄 수 없었다. 방해물과 부딪치며 가닥가닥 갈라진 공기의 실패한 곡예가 전부였다. 상쾌함은커녕 텁텁한 냄새까지 느껴졌다. 도리어 몸에 긴장을 풀고 있던 지네가 급작스런 바람을 맞으며 콧속 점막을 단단히 붙들기까지 했다. 다리의 뾰족한 압력 탓에 코가 간지러웠는데 그보다 자극적인 것은 끝자락에서 살랑이는 더듬이였다. 지네가 더듬이를 계속해서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세게 들이마신 공기에 휘날리는 줄 알았지만, 숨을 참아보는 동안에도 지네의 더듬이는 그야말로 코끝을 계속 더듬었다. 나는 당황하거나 질색하지 않고 숨을 내뱉었다. 오히려 자극이 더 거세지기를 바랐다. 재채기가 나오기 직전이었으니까. 재채기. 순간적으로나마 태풍과 맞먹는 속력을 내보인다는 재채기라면 지네를 간단히 빼낼 수 있을 거였다. 더듬이는 멈춤 없이 코끝을 더듬었고, 재채기의 예감은 멀리서 다가왔다. 더듬이와 재채기는 그런 식으로 교차하다가 이내 하나의 상으로 결합하여 고속열차가 되었다. 정거장에 선 나는 저만치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바라보았다. 특유의 격렬함으로 거센 바람을 끌고 올 열차. 나는 입과 지네가 없는 쪽 콧구멍을 손으로 막았다. 어떤 반응도 불가능한 재채기 태풍에 의해 지네는 방바닥으로 내던져질 것이었다. 무릎걸음으로 움직여 얼굴을 이부자리 바깥으로 내밀었다. 정말 직전이었기 때문에 변기나 쓰레기통 앞까지 갈 겨를이 없었다. 열차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채였다. 누군가 선로에 몸을 던져서 브레이크를 밟더라도 한참이나 지나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신 따위의 초월적인 존재가 장난감 다루듯 개입하는 일이 아니라면 멈출 수 없겠군, 생각하는데 문득 열차를 앞질러 온 무언가가 내게 부딪쳤다. 그것은 당혹, 슬픔, 외로움, 그리고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존재를 향한 깊은 원망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재채기를 돌려보내기 위해 미간에 힘을 주고 숨을 참으니 그렇게 됐다. 재채기는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다. 거센 바람이 덜컹거리는 문의 틈새로 들이닥치려 했다. 나는 지네가 있는 콧구멍까지 손으로 막고 버텼다. 거기에는 어떤 주저도 없었다. 재채기를 하면 안 됐다. 나의 의도를 파악한 지네가 자극을 줄이기 위해 다리의 힘을 빼 주었다. 나 역시 얌전히 있겠다는 지네의 약속을 받아들인 채였다. 우리는 재채기를 막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애썼다. 터져 나올 방향을 잃어버린 재채기는 내부에서부터 소진되었다. 질주하던 열차는 잿가루가 되어 무너졌고, 뒤따르던 거센 바람 역시 잘게 쪼개져 하루살이들처럼 저마다의 방향으로 날아갔다. 문을 두드리던 재채기는 도리어 무언가에 덜미를 잡혀 끌려갔다. 잔뜩 긴장한 채로 오랫동안 숨을 참던 나는 굳게 닫았던 입만 열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콧구멍을 막던 손은 그 뒤에야 떼어냈다. 몸에 가둬진 채 재채기와의 만남과 이별 모두를 겪어 가시가 돋쳐진 날숨이 호흡기 곳곳을 자극하며 빠져나왔다. 나는 지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써 참았고, 해냈다. 


  더듬이와 재채기로 형성된 열차를 제치며 등장한 것은 어느 기억이었다. 어수선한 조각들이라는 점에서 꿈과 다를 바 없었지만, 꿈과 달리 그 기억은 도망치듯 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나무와 흙투성이 세상에 천지개벽이 한번 이루어지며 황량한 수수께끼 세상이 당도한다. 사막? 자세히 살피면 모래가 아니라 먼지다. 단숨에 횡단하자 지면엔 보호색과 같은 현란한 무늬가 펼쳐진다. 마지막에는 황폐한 벌판까지 다다랐는데 아무래도 낯설지 않은 환경이었다. 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동굴에 다다를 무렵, 나는 동굴이 콧구멍임을 깨달았다. 그 내부의 털까지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이건 지네의 시선이었다. 시선 이외에도 들러붙은 감정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으로써는 해독할 수 없는 암호였다. 순간 모든 기억이 종료된 영상처럼 사라졌다. 지네가 제자리걸음을 한 직후였다. 내킬 때까지 움직인 지네가 더듬이로 콧속 점막을 찌르듯 누르자 기억은 다시 나타났다. 나는 이 놀라운 현상이야말로 코털을 수시로 뽑았던 습관이 만든 일이라 받아들였다. 털을 뽑힌 텅 빈 모공에 더듬이가 연결된 상태를 상상했다는 뜻이다. 그런 식이 아니라면 재채기라는 급박함에서 다른 생각 따위가 쉽게 끼어들 수 없을 거였다. 더듬이라는 감각 기관이 모공에 접합하여 주입된 기억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웠다. 물론 더듬이가 출력기관이라기보단 입력기관에 가깝다는 상식을 모르는 건 아니다. 출력과 입력을 떠나 애당초 벌어질 수 없는 상황임을 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기억, 특히 이 서글픈 감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원리야 어떻든 좋았다. 고속철도를 갈아버리며 도달한 감정은 나를 완고하게 만들었다. 지네와 내가 우연히 언어 이전 단위의 신호를 더듬거리며 주고받았다는 가정을 맹신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지네가 다시 더듬이를 연결했으니 나만의 착각이나 인식이 아님은 분명했다.


  나는 이 부정적인 감정들이 주입된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지네가 내게 전달하고자 하는 기억과 감정이 아주 제한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네의 장기 기억 능력이 결여된 까닭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만 전달하게 된 필연이 있다고 여겼다. 더듬이에서 나온 기억을 반복하여 바라본다면 그 필연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기억이 제공하는 거대한 나무와 흙으로 가득한 세상을 유심히 살폈다. 때때로 흙의 표면은 밝은 갈색의 건조하고 부드러운 질감이었다가도, 어떨 때는 습해서 끼리끼리 뭉쳐진 고동색의 표면을 보이기도 했다. 전자에 거대한 나무와 키 작은 풀이 곳곳에 자라나 있었다면, 후자에는 마찬가지로 거대하지만 고고함까지 지닌 매끄러운 표면의 나무 한 그루만 우뚝 솟은 모습이었다. 기억에서 나타난 동굴이 콧구멍임을 떠올린다면 내게 전해지는 시선은 지네가 콧속으로 들어서는 과정일 거였다. 고동색 흙과 나무를 유심히 살피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분 앞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 코를 가린 채 휴대전화 플래시를 켰다. 빛을 받은 화분의 흙은 눅진했고 고동색이었다. 거기에 나만큼 자라난 고무나무 한 그루까지. 자세히 보니 흙은 마냥 고동색이지만은 않았는데, 내가 빌라 주차장 화단에서 멋대로 퍼온 흙을 대충 덮은 탓이었다. 지네가 내 기억에 반응하며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는 게 느껴졌다. 다른 질감이 뒤섞인 흙의 표면이었다. 장담컨대 나의 기억을 전가한 게 아닌, 분명한 지네의 기억이었다. 감정이 선명해짐을 느꼈다. 지네는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나도 나를 원망해 보았다. 그러자 양쪽 옆구리의 갈비뼈가 지네 다리처럼 위아래로 흔들렸다. 골반과 바깥쪽 복사뼈, 새끼발가락까지 그렇게 됐다. 단번에 터전을 잃은 마음이 이토록 격렬한 걸까, 궁금해진 나는 자신을 향한 원망을 멈추지 않으면서 직접 몸을 흔들었다. 의도와는 달리 점점 춤을 추는 기분이 됐다. 즐거웠다. 지네가 내 감정을 읽고 모욕감을 느끼는 일을 바라지 않았기에 춤을 멈출까 싶었다. 한데 춤과 즐거움의 좌우반동 뒤편으로 원망이 그대로 서 있음을 발견했다. 다소 어색한 광경이었다. 원망과 즐거움의 공존. 감정은 항상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둘이 서먹함을 넘어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둘은 서로를 모르는 체하는 게 아니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춤이 나의 의지였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춤은 지네의 것이었고, 나는 그저 원망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네에게도 춤이란 게 있나? 구애 따위에 써먹는? 거기까지 궁금해지자 지네의 기억이 활짝 열려 빛처럼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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