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다시 한번!”이라고 말하게 했다.
엄마와 산책을 하면서 내가 싫어하는 친구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다가 지나가는 말로 “근데 내가 살아보니까, 나를 괴롭혔던 친구도 결국 나한테 다 득이 되는 거더라. 해만 되는 일은 없어. 하다못해 싫어하는 친구 때문에 ‘저런 유형의 사람은 다음에 이렇게 대처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면, 그건 그 친구가 큰 교훈을 준 거잖아. 사람은 언제나 좋지 않은 상황의 극단으로 가봐야 비로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깨달음을 얻게 되니까. 지금은 이 얘기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를 수도 있어.”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너무 낙관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니체 사상의 키워드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간단히 하나의 구조로 압축할 수 있다. 먼저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니체는 당시 유럽의 많은 사람이 신을 믿고 천국과 같은 이데아를 꿈꾸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대신 그는 ‘대지’, ‘자신’ 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다보면 –이 세상과 삶을 고민하다 보면- 허무를 느끼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한 상태가 바로 니힐리즘이고 그것의 극단이 ‘영원회귀사상’이다. ‘영원회귀사상’은 간단히 말하면 새로운 것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염세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다. 니체는 오히려 인간이 영원회귀사상의 성숙을 통해 삶의 절대적인 긍정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니힐리즘을 직시하고 새로운 창조적 자유를 확보한 사람이 ‘초인’인 것이다.
이렇게 니체 사상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하더라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란 매우 어려웠다. 이 책의 첫 장에 ‘만인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이라고 쓰여 있는 만큼, 차라투스트라의 말과 행동은 분명히 강렬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비유를 해석하고 그 내용을 다시 음미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또한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대해서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번번히 ‘여성다움’, ‘남성다움’을 언급한다든지, “누가 대지의 지배자가 되어야 하는가?”*1)와 같은 말을 통해 리더로서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등의 내용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한 만약 기독교 신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예수와 신도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아 더욱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되었던 야마구치 수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자의 아웃풋에 대한 옳고 그럼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 생각의 프로세스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될 만한 신선한 가르침이 분명 있을 것이다.*2) 따라서 나는 단편적으로 차라투스트라의 언행을 찬양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나의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곱씹어보는 독서 방법을 선택했다.
다시 앞선 이야기로 돌아오면, 엄마는 실로 니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인간관계로 인해서 괴로워하거나 슬퍼하는 자는 바보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결국 오직 자기 자신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주석 :인간은 타자와의 모든 체험조차 본래의 자기를 체험하는 우회로일 뿐이다.”*3) 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차라투스트라가 숲속에서 춤을 추는 소녀들이 사라진 후 제자들에게 했던 말도 인상적이었다. “초원은 축축해지고 숲으로부터 냉기가 닥치는구나. 미지의 것이 나를 둘러싸고 깊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저런!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아직도 살아있는가? 왜? 무엇을 위해? 무엇에 의해서? 어디로? 어디서?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가? 아, 나의 벗들이여, 나의 내면에서 이렇게 묻는 것은 저녁이다. 내가 슬퍼하는 것을 용서하라!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 된 것을 용서하렴!”*4) 차라투스트라는 순수하게 삶을 즐기며 ‘춤’을 추는 소녀들을 통해 자신에게 삶에 대해 되묻고 있다. 이는 삶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다. 나도 꽤 오래전부터 ‘인생은 무엇일까?’,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인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삶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이러한 질문들의 답은 쉽게 찾아낼 수 없다. 인간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간간히 이런 질문을 내면에 던질 뿐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이러한 인간의 삶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일상의 끊임없는 숙제와 시험들이 삶에 대한 고민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인식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기도 하고 살아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면서도, 하면 할수록 답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운명은 슬픈 저녁과 같다. 인간의 슬픈 운명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도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만으로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삶에 대한 고민 이외에 차라투스트라가 창조에 관해 말한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제발 이 ‘위해서’를 잊어버려라, 그대들 창조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의 덕은 그대들이 ‘위해서’, ‘목적으로’, ‘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바라고 있다.”*5)라고 강조한다. 글을 쓰는 일이 창조와 같이 거창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것 또한 목적이 아닌 그 행위 자체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글을 쓰고 나면 읽는 사람의 반응을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이제 그것보다는 글을 쓰는 동안에 ‘내가 즐기고 있는지’와 같이 나 자신에, 과정에 주목해봐야겠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삶과 죽음, 고통과 쾌락, 최선과 최악은 각각 동의어다. 니체는 극히 어두운 내용을 통해 절대적인 삶의 긍정을 역설한다. 흔히 “밑바닥을 쳐야 다시 올라올 수 있다”는 말처럼, 그는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깊은 쓸쓸함이나 절망감이 당연하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통해서야 말로 인간이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을 좋아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상은 우리의 삶과 결코 멀리 떨어진, 이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 책의 4부 ‘취거취가’에서 차라투스트라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가장 추악한 자’도 결국 “이것이 삶이었던가…. 자아! 다시 한번!”*6)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인간이 각자의 아름다운 인생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사랑할 수 있도록 그 길옆에 가로등을 켜주었다.
1)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e-book), 문예 출판사, 2010, 964쪽.
2) 야마구치 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e-book), 다산초당, 49쪽.
3)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e-book), 문예 출판사, 2010, 462쪽.
4) 위의 책, 339쪽.
5) 위의 책, 877쪽.
6) 위의 책, 955쪽